놀이는 문화가 되고, 문화는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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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는 문화가 되고, 문화는 예술이 된다

– 영화 감독 이호재

 

몇 해 전 여름방학이었다. 당시 수중에 남은 80만 원을 들고 1년간 유럽을 여행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마저도 혼자만의 경비가 아닌, 무려 일곱 명이라는 사람들이 모인 한 팀의 총 경비였다. 여행의 방법은 물물교환의 방식이었다. 영화과 동기였던 우리는 유럽의 호스텔과 레스토랑 등의 홍보영상을 찍어주고 숙식을 해결하겠다는 단순명료한 생각을 했다. 내친김에 몇 가지 계획을 더 추가했는데, 그중 하나는 제2의 비틀즈가 될 법한 신인 뮤지션을 발굴하고, 그들의 데뷔 뮤직비디오까지 만들어보자는 거였다. 심지어 이 모든 과정을 영화로 만들어 개봉하겠다는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러한 이야기를 접한 대부분 사람들에겐 이것이 그저 허무맹랑하고 철없는 생각처럼 들렸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에 학교에서의 평판이 형편없었다. 학업 성적은 늘 바닥을 쳤고, 관심사라고는 게임, 만화, 패션, 영화뿐이던 우리에게 어떠한 기대도 힘들었을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주변에서는 단지 우리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한 핑계를 대며 현실도피 하는 거라며 비아냥거렸다.

 

비록 우리는 반드시 무언가 되어야만 하는 시대에 태어나긴 했지만, 무언가 되는 방법마저 획일화된 경향이 있다. 경쟁에서 조금만 뒤처지거나 주변에서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종종 낙오자로 각인되기도 한다. 생존 구조가 마치 깔때기처럼 좁아져 가는 경쟁의 세계는, 포화 상태인 깔때기의 꼭짓점을 넓히는 대신 차라리 우리의 눈높이를 낮추라고 요구하는 상황이다.

 

태어나서 1년이 지나면 하나같이 돌잡이를 하고, 장래희망란에 무수히 많은 꿈을 그려 넣도록 하더니 정작 이제 와 꿈을 꾸는 자들에겐 그것이 유아기적 발상이라 치부하는 것은 대체 무슨 변덕이란 말인가. 어려서부터 꿈을 갖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태생적 사명감을 짓밟힌 우리가 자신을 호기롭게 세상에 던질 희망이 있기나 한 걸까.

 

그토록 사람들이 터무니없다며 혀를 차고 비웃었던 우리의 프로젝트가 작년 겨울,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라는 이름의 영화로 개봉했다. 우리의 놀이가 예술로 변태하고, 문화의 범주로 수용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몇 년간의 설움을 날려버린 통쾌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생산 능력의 결여자들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재밌는 반응은, 우리가 일찍이 재능을 잉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 명명하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일컫던 게임 중독자, 패션 관심 종자, 만화 오타쿠 잉여들에게, 어떠한 능력을 발굴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점치지 않았던 이 사회가 이제 와 재능의 원천을 들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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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을 컴퓨터 앞에 앉아 주야장천 게임만 하던 잉여는 유럽 전역을 발칵 뒤집을 만한 화려한 그래픽 요소들을 구현해냈고, 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독특한 패션을 지향하던 친구는 호스텔 업계의 슈퍼스타가 됐다. 영화 폐인은 다양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데 탁월했고, 오타쿠라 불리던 녀석은 만화 캐릭터를 만들어 움직이게 하는 데에 능했다. 사람들이 하찮게 여겼던 하위문화가 한 개인에게 축적되어 전혀 다른 유형의 재능을 발현하게 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내 SNS에는 하루에도 몇 통씩,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놀 거리를 구상 중인지 전해오는 사람들이 많다.  개중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친구들도 있고, 대학 자퇴생도 있으며, 자신이 다니던 직장을 관둔 사람 등 다양하다. 반갑게도 이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놀이와 예술은 불가분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노는 곳엔 늘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고 또 다른 문화가 형성된다. 나아가 문화가 지속하면 내부에서는 예술이 탄생한다. 나와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는 계획을 전해 들을 때면 되레 나 스스로 자극받아 앞으로 얼마나 더 치열하게 놀아야만 할지 궁리하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즐거운 경쟁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유럽에서 제작한 첫 번째 홍보 영상>

우리는 호스텔이나 민박 등의 홍보영상을 만들어주고 숙식을 해결하겠다며 무작정 계획을 세우고 유럽으로 떠났다. 고작 80만원을 들고. 물론 현실은 참담했다. 위기를 맞았던 우리에게 기회가 되었던 호스텔 홍보영상 첫 번째.

 

첫 번째 홍보영상이 온라인상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며 몇몇 곳에서 우리에게 홍보영상 제작을 의뢰해왔다. 우리는 놀면서 숙식을 해결하고 또 놀면서 우리만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모두가 영화라는 콘텐츠로 생산되었다. 모든 예술문화가 결국은 놀이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진지하고 무거워야 진심인 것은 아니듯이.

 

 

 

영화감독_이호재_프로필

1985년 부산 출생.

예술영화를 매일 보고 싶어 국제통상학과를 그만두고 국도극장에 출근하다시피 한다. 그러다 막무가내로 졸라 영사기사로 1년 반을 일한다.  다시 영화과에 진학하고, 거기서 잉여 멤버를 만나지만 다음 학기 대학등록금 마련이 무산되자, 물물교환 유럽 여행을 기획했다. 이것이 바로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0여 개 호스텔 영상 작업

센티멘탈 시너리 ‘View’(2011), Arco ‘Stars’(2010)  뮤직비디오 작업

에피톤 프로젝트 ‘떠나자’ 티저(2012) 등 작업

최근에는 서플러스X의 이름으로 파스텔뮤직(캐스커, 에피톤프로젝트, 짙은), 에이전시가르텐, 대림미술관, 유즈드퓨처 등과 함께 ‘사랑의단상’ 프로젝트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