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신화 #3 슬라브 신화의 공포와 마력

게임의 신화적 요소를 요모조모 파헤쳐 보는 ‘게임과 신화’.

3편에서는 유럽 신화 중 하나로, 최근 폴란드 게임 ‘위쳐’를 통해 주목받고 있는 슬라브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 ͜ʖ ͡°)


 게임과 신화, 3편의 주제는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슬라브 신화입니다.
 
슬라브 신화란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슬라브어파의 언어를 사용하는 중부 유럽 민족(슬라브족)의 공통적인 신화를 가리킵니다.
 
관록의 게이머라면 고전 어드벤쳐 게임 ‘퀘스트 포 글로리’를 아실 텐데요,  4편 ‘섀도우 오브 다크니스’는 슬라브 신화와 크툴루 신화를 뒤섞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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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출시해 시리즈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은 퀘스트 포 글로리 4

#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 

슬라브족은 9세기 경, 중부 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까지 슬라브족 고유의 문자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때문에 슬라브 신화는 북구 신화처럼 구전으로 전해졌습니다.
 
9세기 중후반, 기독교 선교를 위해 중부 유럽에 파견된 성 키릴로스가 슬라브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슬라브 어 표기를 위한 문자인 글라골 문자를 개발합니다. 
 
 글라골 문자는 슬라브 어 관련 문자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러시아어 등에서 쓰이는 키릴 문자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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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골 문자로 쓰여진 루카 복음서  #빵상빵상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키릴 문자를 보면 이걸 대체 어떻게 읽나 싶지만, 한번 익히고 나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러시아어 문법이 세계적으로도 가장 어렵다는 건 함정.
 
슬라브족이 직접 남긴 기록이 없다보니 슬라브족에 대한 기록은 죄 타 민족이 남긴 것뿐입니다. 주로 탐험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거라 정확하다고 보긴 힘들죠.
 
슬라브족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5세기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가 자신의 유명한 저서 ‘역사’에 남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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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
 
여기서 헤로도토스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에 사는 네우로이족에게 특이한 능력이 있어서 매해 며칠 동안은 늑대로 변신한다는 내용을 언급했습니다. 
 
이는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진 늑대인간 신화의 원형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베드마크(vedmak)’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에 대한 것이라 볼 수도 있죠.
 
베드마크는 ‘마녀’의 남성형, 그러니까 남자 마법사 정도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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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소설, 게임 등에 종종 등장하는 늑대인간 
 
베드마크는 부정적인 이미지 일색인 마녀와 달리 선한 면모도 갖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다친 사람이나 동물을 치료해 주기도 하고, 마녀들이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도 했다고 하는군요. 물론 사람을 해치고 늑대나 나방 같은 생물체로 변신하는 능력도 있다고 합니다. 
 
베드마크라는 단어는  슬라브족 국가인  러시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 세르비아 등 각각의 언어로 전승을 거쳐 내려옵니다.
 
1986년, 폴란드 작가 안제이 사프콥스키가 베드마크가 주인공인 판타지 소설 ‘비에트민(wiedźmin)’을 발표하면서 베드마크는 크게 유명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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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이 사프콥스키의 판타지 소설 시리즈 
 
비에트민은 베드마크를 뜻하는 폴란드어로, 첫 작품이 호평을 받자 사프콥스키는 소설 속 주인공과 세계관을 발전시킨 시리즈를 연달아 내놓으며 폴란드의 대표적인 판타지 소설가로 자리매김합니다.
 
소설이 뜨면 영화나 게임 등으로 제작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겠죠? 폴란드의 게임 개발사 CD프로젝트는 2007년, 이 소설을 기반으로 한 액션 RPG를 발표합니다. 
 
그 게임이 바로 그 유명한 ‘위쳐(Witcher)’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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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출시한 위쳐 1
 
2015년에 발표된 위쳐 3: 와일드 헌트는 그해 ‘올해의 게임’상을 싹쓸이하며 1년 동안 전세계에서 1천만 카피 이상을 팔아치울 정도로 대단한 흥행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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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최고의 흥행 성적을 갱신한 위쳐 3
 
개발사인 CD프로젝트는 위쳐 3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게임 개발사로 발돋움했습니다.
 
폴란드 게임 산업이 들썩들썩하니 폴란드 정부도 최근 들어 자국의 게임 업계를 지원하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위쳐에서 만나는 슬라브 신화

위쳐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캐릭터들은 대부분 슬라브 신화에서 그 모티브를 따온 것들입니다. 그중 가장 소름 돋는 캐릭터는 ‘보츨링’인데요.  
 
하단에 다소 혐오 + 공포스러운 이미지가 있으니 심장이 약하신 분들은 스크롤을 빠르게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보츨링은 위쳐 3에서 최고의 퀘스트로 꼽히는 ‘집안 문제’ 퀘스트에 등장하는데,  아버지의 학대로 어머니가 유산한 이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한 태아가 괴물로 변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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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은 슬프지만 꿈에 나올까 무섭네요
 
보츨링은 슬라브 신화의 ‘포로녜치’라는 악마와 매우 유사합니다. 포로녜치는 유산된 태아나 장례를 치르지 못한 유아가 악마로 변신한 것입니다.
 
실현되지 못한 생명의 가능성 때문에 포로녜치는 매우 강한 악마라고 해요. 게임에서 주인공 게롤트는 보츨링을 없애거나,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합니다. 
 
보츨링 못지 않게 인상적인 캐릭터로는 숲속의 마녀인 ‘크론 자매(Crones)’를 꼽을 수 있죠. 숲을 지배하는 이 마녀들 또한 슬라브 신화의 ‘바바야가’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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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캐릭터가 많은 위쳐3에서도 무척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는 세 자매님들
 
바바야가(‘노파’ 또는 ‘추녀’라는 뜻입니다) 또한 숲 속에 사는 기괴한 노파의 모습을 한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
 
바바야가는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바바야가 전승에 대한 책을 쓴 연구자 안드레아스 존스는 바바야가를 슬라브 신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존재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툼레이더 시리즈의 최근작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의 DLC 에서도 바바야가를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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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 – 바바야가 DLC의 한 장면

 

# 위쳐의 성공 비결

게임 산업과는 별 인연이 없어 보였던 폴란드에서 위쳐 3와 같은 세계적인 수작이 나왔다는 것은 무척 신기한 일입니다. 
 
게임 자체를 잘 만들기도 했지만, 슬라브 신화 특유의 존재들을 전세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드라마의 형태로 만든 개발사와 원작자의 역량 덕이라 볼 수 있죠. 
 
신화라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문화 콘텐츠를 가장 훌륭하게 가공하여 성공시킨 사례로 위쳐 시리즈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거론될 것입니다. 
 

김수빈김수빈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GW 베이직으로는 안되길래 책을 보니 C를 배워야 한대서 엄마한테 학원 보내달랬더니 공부나 하라고 해서 포기. 게임 잡지 기자가 되고 싶었으나 게임 잡지들이 하나씩 망하는 것을 목격. 매일 수련을 거듭하고 있으나 나라를 위해 싸우지는 않으며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 뿐.

 

 

 

 

게임과 신화 #1 게임으로 만나는 북구 신화

게임과 신화 #2 본격 이집트 신화 게임, 파워 슬레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