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게임 #21 Loom

게임회사 사람들이 꼽는 ‘내 인생의 게임’은 무엇일까요?

독특한 세계관과 아름다운 음악으로 영알못 꼬꼬마에게도 감동을 주었던 게임 ‘Loom’의 추억을 이길주 님이 전합니다.  ٩(๑•̀o•́๑)و


저에게 있어 인생 게임은 언제나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어드벤처 게임의 명가(名家) LucasArts가 문을 닫기 전, 한창 잘나가던 LucasFilm Games이던 시절에 장인 정신으로 찍어낸 한 편의 동화 같은 게임, 바로 Loom 입니다.

 


사실 뭐든지 재미있을 꼬꼬마 시절 감동의 추억을 20여 년 넘게 미화시켜 가면서 간직한 저한테야 “뭘 물어? 당연히 최고지”라는 말이 튀어나오겠지만, Loom과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 이 게임이 어째서 인생 게임인지 알려주려 한다면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딱히 생각나지 않네요.

그래서, 갓-게임이니 뭐니 하며 무턱대고 찬양하기보단 그냥 옛날 추억담 꺼내듯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어차피 하다 보면 찬양글이 될 거…)

 

최초로 Loom을 만난 것은 중학교 시절 친구네 집 컴퓨터의 초록색 모니터에서였습니다.

친구가 하는 것을 옆에서 보니까 그저 캐릭터가 이리저리 걸어댕기면서, 화면의 이것 저것을 누르면 영어가 막 쏟아져 나오는데, 그냥 게임이 좀 지루해 보였습니다.

그 전까지 재미있게 즐겼던 게임은 대부분 액션 게임이었으니, 이런 방식의 게임은 처음이었던 거죠.

나중에 그 친구가 재미있다고 빌려줄 테니 해보라고 권해 주길래, 당시에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사 주신 최신형 AT 컴퓨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요. 허큘리스 모니터가 아닌 컬러 모니터에서 Loom의 별빛 반짝이는 인트로 화면을 보는 순간, 뽕 맞은 사람 마냥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임 시작도 안했는데 감동적인 Loom 인트로

푸르스름한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곧이어 메인 테마곡이 흘러 나옵니다.

커다랗게 Loom 타이틀이 나타나면 그 뒤로 쪼그맣게 백조들이 날아가는 모습… 왜인지 잘 설명할 순 없지만, 그래픽+BGM+연출의 이 삼위일체 오프닝은 마음속 판타지를 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저 신비로운 화면 속 세상에 뛰어들고 싶은 모험심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던 거죠! 와우!

자, 모험을 떠나자!

 

감동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음악을 연주하여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마법도 저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먼저 배우는 마법은 무언가를 ‘여는’ 마법인데요, 이것으로 조개를 열기도 하고, 알 속에 갇힌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알을 열기도 하고, 심지어 나중에는 하늘을 찢어 열기도 합니다.

단순히 ‘연다’는 행위를 마법으로, 이렇게 기발한 곳에 활용하는 것을 보며 어린 마음에 절로 무릎을 탁 치며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공은 마법사!

Loom에서는 이런 마법 행위만을 남기고 다른 행동은 과감히 생략하였는데, 게임이 좀 단순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마법을 부리는 주인공의 상황극에 오히려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 주인공이 마법사니까. 모든 걸 마법으로 해결하면 되는 겁니다.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해 마법이 거들어주는 느낌?

 

스토리 하니까 생각났는데, 사실 영알못 꼬꼬마 시절이라 게임의 수많은 텍스트를 무시하고 그림(과 게임잡지의 공략…) 위주의 플레이를 하다 보니 정확한 스토리는 모르고 진행하였습니다.

단지 제한된 정보로 추측할 뿐이었죠. 그래서 그 뒤에 감춰진 더 많은 매력을 당시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긴 텍스트는 패스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되어 다시 플레이 해보고, 추억을 되새기며 인터넷도 찾아보고 하니, 몰랐던 이야기들이 더 많이 숨어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Loom이 더욱 더 좋아지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였습니다.

 

#아름다운 음악

게임에 사용된 아름다운 배경음악은 모두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발레 곡들을 가져와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엔딩 크레딧에 떡하니 박혀 있음에도 당시에는 몰랐음)

근데 이 음악이 기가 막힐 정도로 게임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마치 음악에 맞추어 게임을 기획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인데요.

당시에도 음악이 오죽 마음에 들었으면, 메인 테마의 멜로디를 더듬어가며 학창 시절 필수 악기 리코더(!)로 연주를 시도할 정도로 음악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

당시에도 좋았지만 클래식 원곡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십분 활용하여 감동을 끌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 게임을 더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게임을 위해 작곡한 곡들이 아닌데도 이렇게나 잘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하고 적재적소에 사용한 개발자의 센스가 정말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백조의 호수 음악이 떠오르지 않는 분들을 위해 살짝…

 

#인상적인 세계관, 스토리

재미난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가장 감탄한 것이 바로 세계관 입니다.

요즘 판타지 하면 보통은 인간, 오크, 엘프가 나오는 톨킨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거나, 세상을 멸망시킬 마왕을 물리치는 용사의 스토리가 많습니다.

예전, 특히 어드벤처 게임의 황금기에는 좀 더 독특한 판타지 세계관의 게임들이 많았는데요.

좋은 스토리는 시대와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말에 공감하며, Loom의 스토리는 지금 봐도 충분히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위대한 길드의 시대, 점차 진행되는 산업화로 각 길드들은 점차 쇠락해가며 정치, 전쟁 등의 소용돌이 속에 서서히 사라지고 있던 시대에, 수천 년에 걸쳐 자신들의 기술을 극한까지 단련한 직조 길드는 이제 옷감 속의 패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만물에 내재한 패턴을 인식하고 직접 조절하는 먼치킨 수준에 도달하였고, 궁극적으로 ‘세상을 직조할 수 있는’ 베틀(Loom)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극한의 기술을 추구하기 위해 길드는 오랫동안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고, 그 결과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맥이 끊어질 지경, 한 장인이 결국 베틀의 힘을 이용하여 새로운 아이를 창조해내는 금지된 일을 하고 맙니다. 그 장인은 벌로 백조가 되어 유배를 떠나고, 그렇게 태어나 미움 받으며 자란 주인공은 17세가 되는 해에 운명을 결정할 길드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위대한 길드가 존재하는 시대, 수백 년도 아니고 수천 년 씩이나 기술을 갈고 닦아 세상까지 조정할 지경이라니, 가히 스케일도 남다릅니다.

옷감 만들던 사람들이 마법을 개발하다니,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장인들을 갈아 넣었을까…

직조의 세계!

그리고 그 수천년의 결실인, 세상을 직조하는 마법의 설정 또한 재미있습니다.

마법으로 사용하는 음악을 게임 안에서는 ‘draft’ 라고 부르며, 다시 ‘throw’, ‘beat’, ‘treadle’, ‘rest’라는 4개의 음절로 나뉩니다.

왜 이런 뜻 모를 이름을 붙였을까요? 처음에는 음악 관련 전문 용어인줄 알았으나, 아니었습니다!

검색을 거듭한 끝에 알게 된 사실은, draft란 옷감 짜는 방적(spinning)의 한 단계이고 각 음절의 뜻 모를 이름은 draft를 진행하는 4가지 동작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게임의 핵심 장치인 마법도 알고 보니 단순한 ‘음악 마법’이 아니라 직조 길드의 컨셉을 반영하여 설정했던 거죠.

 

 

이 밖에도 흥미 있는 특징은 많습니다.

몰라도 게임하는데 지장이 없을 ‘각 마법의 배경스토리’가 친절하게 매뉴얼에 모두 나와 있고, 심지어는 게임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오디오 드라마’로 제작한 카세트 테이프도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국내판에선 누락)

직접 찍었어요~ Loom 한글 메뉴얼(복사본)

 

이쯤 되면 Loom이라는 게임은 뭔가 양산형 시스템을 활용하여 껍데기와 스토리만 바꾼 게임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큰 세계관을 설정하고 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래픽, 음악, 퍼즐과 인터페이스는 물론이고 패키지 구성물까지 모두 알차게 맞추어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오래된 게임(1990년 출시)이 이렇게 많은 노력과 세세한 부분까지 완성도 높은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개발자 입장에서 참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반성도 하게 됩니다.

 

나는 얼마나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가.

게임이 전달하고자 하는 재미와 컨셉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일정에 쫓기고 중요하지 않다고 멋대로 판단하며 대충 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직접 찍었어요~ #2 소장중인 Loom 국내 정발판 (박스 타입 초기버전)

 

영어도 할 줄 모르는 꼬꼬마 시절, 얼마나 Loom의 스토리를 잘 이해했을까요?

처음 플레이 하면서 분명 감동을 받았지만 그 시절의 감동은 ‘훌륭한 스토리다’ 라기보다는 멋진 그래픽과 훌륭한 음악, 그리고 Loom 만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마음에 녹아 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나아가, 굳이 텍스트를 안(못…) 읽어도 게임이 주고자 하는 재미를 충분히 효과적으로 저에게 전달해 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 Loom을 하면서 저는 제가 꿈꾸는(해보고 싶은) 이상적인 게임 플레이를 경험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저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경험을 주고 싶다는 꿈(게임 개발자)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그런 게임을 개발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이길주 박스 속에 재미가 한가득 넘치던 그 옛날 패키지 게임처럼, 내 인생의 상자 속에도 한가득 재미가 넘치기를 바라는 게임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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