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스토리텔링 #8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

게임 칼럼니스트 이경혁 작가가 들려주는 게임 속 숨겨진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야기.

‘게임 속 스토리텔링’ 8편에서는 1999년에 출시된 정통 RPG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의 서사 구조를 소개합니다.



※ 주의: 본 글은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스토리로 칭송 받는 게임을 꼽을 때 항상 순위권에 들어가는 RPG가 있습니다.

바로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이하 <토먼트>)입니다. 소위 ‘갓겜’을 논할 때 빠지기 어려운 게임이지요.

장편소설 수준의 방대한 대사량, AD&D(Advanced Dungeons & Dragons) RPG 세계관의 탄탄한 설정으로 풀어나간 <토먼트>의 이야기는, 게임에 대한 찬사만큼 널리 알려지진 않았습니다.

오래된 게임이고, 불편하고 지루한 전투 시스템 때문입니다. 세계관 역시 다소 난해하고 어렵지만게임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토먼트의 방대한 스토리를 창조한 게임 디자이너 #크리스_아벨론

이번 편에서는 치밀한 구성과 철학적인 서사가 돋보이는 <토먼트>의 스토리텔링을 다뤄보겠습니다. 스토리에 대한 스포일러로 가득 차 있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 ̄)

 

# 불사의 주인공, 관념이 실재하는 세계관

게임 <토먼트>의 주인공인 ‘이름없는 자(Nameless One)’는 죽어도 다시 부활하는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마다 모든 기억을 잃습니다.

이름이 없다는 점은 ‘플레인스케이프’라는 <토먼트>의 독특한 세계관에서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시체안치소에서 깨어나는 주인공, 이름 없는 자

방대한 AD&D의 세계관을 이 짧은 글에서 풀기는 어려우나, 플레인스케이프는 인과율이 강하게 작용하는 ‘관념이 실재하는 세계’ 정도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안에서는 사랑, 증오 같은 관념이 물리 법칙처럼 인과율로 작용하며, 플레이어에게 실재하는 개념으로 다가옵니다.

관념이 살아 숨쉬는 세계 #플레인스케이프

현실에서 ‘나’는 나의 이름(관념)과 실재로 구성됩니다. 한편 플레인스케이프는 관념의 세계이므로, 여기서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다시 말해 ‘존재가 없는 자’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과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은, 곧 자아를 찾는 여정과 같습니다.

 

# 불멸의 원인은 거짓말, 그리고 밝혀지는 진실

모험 속에서 주인공은 왜 자신이 이름을 잃었는지를 알아냅니다.

원래 주인공은 악마들의 영원한 전쟁에 참전한 용병이었습니다. 전쟁 중 주인공은 아주 큰 죄를 짓는데, 플레인스케이프에서는 인과율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속죄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주어진 생만으로는 속죄가 불가능한 대죄를 지은 주인공은, 진정한 속죄를 위해 불멸자가 되기로 합니다.

불멸의 존재가 된 주인공 #네임리스원

주인공은 대마법사를 찾아가 불사 마법을 시전 받지만, 마법은 오류를 일으키고 맙니다. 불사이긴 하지만 부활 때마다 그 전의 기억을 잃는 사태가 초래된 것이죠.

그런데 게임 스토리를 따라가 보면, 속죄를 위해 불사를 택했다는 이야기는 주인공에게서 떨어져나간 화신 중 하나가 거짓말한 내용이란 걸 알게 됩니다.

사실은, 플레인스케이프의 강력한 인과율이 주인공을 찾아내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 두려워 불멸을 선택했다는 것이죠.

운명의 사슬을 끊기 위한 주인공의 힘겨운 여정

 

# Torment의 의미는 ‘고통’이 아니다

게임 후반부에 진실을 알게 된 플레이어의 선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심이 될 선택은 분리되었던 죽음과 재결합하는 것입니다.

죽음과 결합하여 필멸의 존재로 돌아오는 플레이어의 선택은 어쩐지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볼까요? 플레이어는 불사의 존재지만 부활마다 전생의 기억을 잃는 불완전한 불사입니다. 그런데 이 결과는 죽음과 벌이라는 공포를 피한 결과입니다.

엔딩에서 플레이어는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본래의 존재를 되찾고, 비로소 불완전한 불사로 인한 순환을 끊어내고 자기 자신을 자각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토먼트>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 던지는 해탈의 이야기를 다룬 게임니다.

돌고, 돌고 또 돌고 #인생 #윤회 #뫼비우스의띠

 

# 해탈의 과정에 대한 게임적 우화

게임명 <토먼트>는 게임 속 윤회의 이야기를 뒷받침합니다.

보통 고통이란 뜻으로 번역되는 영단어 ‘토먼트(torment)’는 어쩌면 번뇌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끝없이 다시 태어나지만 과연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에서 오는 그 고통을 우리는 번뇌라고 부릅니다.

수 없이 죽음의 바다를 넘어서는 유일한 방법이, 오히려 죽음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아이러니. 이것이 바로 ‘토먼트(torment)’를 고통이 아닌 번뇌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삶과 죽음의 철학적 은유를 담은 #토먼트 #심오 #진지

윤회의 굴레를 넘어서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게임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우리를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즉 게임 속을 헤매는 플레이어를 구도자의 길로 이끄는 것이죠.

이제 <토먼트>라는 제목을 번뇌라고 읽어보면 어떨까요. 그 순간 게임의 레벨업 과정은, 깨달음을 향한 느릿한 한 걸음 한 걸음 즉,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이경혁 게임제작 관련업에 종사한 경험이 없는 순수 게이머 출신의 게임칼럼니스트. 게임의 매체성에 주목하며 게임비평을 통해 사회 전반에 게임의 매체성을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저서로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이 있으며, 성균관대학교에서 <게임과 인문학> 교양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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