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스토리텔링 #9 헤비 레인

게임 칼럼니스트 이경혁 작가가 들려주는 게임 속 숨겨진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야기.

‘게임 속 스토리텔링’ 9편에서는 2010년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헤비 레인>의 독특한 스토리텔링 구조를 소개합니다.


   

많은 게임들이 고전적인 서사의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서사 그 자체에 충실한 게임 장르는 아무래도 어드벤처일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플레이어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제한되기 때문에 심지어는 게임이 아니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주로 어드벤처 게임들은 주어진 서사를 따르는 데 충실합니다.

플레이스테이션 3에서 독점작으로 발매되어 최근 PS4로 리마스터를 거친 <헤비 레인> 또한 스토리텔링의 비중이 무척 높은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대단한 액션이나 다채로운 논리 퍼즐도 없지만, 두터운 스토리와 이를 풀어가는 전개방식은 다른 매체보다 더 깊은 몰입감을 선사하며 플레이어를 이야기의 깊은 곳으로 끌고갑니다.

게임 전문 사이트 게임존에서 10점 만점에 9점을 받은 <헤비 레인>

 

# 폭우 속 도시의 연쇄살인마를 쫓아라

<헤비 레인>은 폭우가 쏟아지는 미국 필라델피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게임으로, 아이들을 납치해 살인하는 ‘종이접기 살인마’를 추적하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첫째 아이를 교통사고로 잃고 둘째마저 살인마에게 납치 당한 아버지. 피해자들의 의뢰를 받아 살인마의 뒤를 쫓는 사립탐정. 우연찮게 사건에 얽히게 된 사진기자와 오랫동안 살인마를 추적해 온 FBI 프로파일러까지.

<헤비 레인>은 이렇게 네 캐릭터의 관점에서 에피소드를 진행하며 스릴러 영화 같은 이야기를 그려냅니다.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운명은…? (︶︹︺)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아버지 에단 마스는 첫 아이를 잃은 후 트라우마를 앓습니다. 간헐적으로 기억을 잃는 증상이죠.

그가 기억을 잃은 사이 둘째 아이를 납치 당합니다. 이후 다시 기억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자신의 손에 살인마의 상징인 종이접기 인형(오리가미)이 쥐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이딴 게 왜 내 손에… (」゜ロ゜)」

 

# 4명의 캐릭터가 이끄는 멀티 엔딩

<헤비 레인>의 이야기는 아이의 아버지가 살인마일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게임은 끊임 없이 더 많은 단서와 가능성들을 흩뿌리면서 이야기의 진행과 결말에 대한 플레이어의 더 큰 추리욕을 자극합니다.

아이 아버지를 포함한 네 명의 주요 등장인물은 플레이어가 직접 이야기 전개에 따라 컨트롤할 수 있는 캐릭터로 기능합니다.

아버지, 사립탐정, 사진기자 그리고 FBI 프로파일러는 각자가 가진 추가 정보와 자신의 입장, 사용 가능한 도구들을 활용해 살인마의 정체에 접근합니다.

네 사람은 때로는 서로를 만나고 때로는 서로를 지나치며, 마치 네 줄기의 끈을 꼬아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 가듯 게임의 전개를 풀어갑니다.

왼쪽부터 사진기자 매디슨, 아빠 에단, 프로파일러 노먼, 사립탐정 스캇

 

# 실패의 결과도 서사가 되는 게임

<헤비 레인>은 일반적인 어드벤처 게임들과는 다른 독특한 플레이 방식을 요구합니다. 바로 게임 오버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인데요.

일반적인 서사 중심 게임들의 경우, 특정한 이벤트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실패하면 게임 오버가 뜹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다시 플레이할 수 있도록 시간을 되돌리곤 합니다.

물론 모든 어드벤처 게임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실패 – 게임 오버 – 트라이 어게인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헤비 레인>은 실패의 순간 자체를 서사의 바깥으로 빼지 않고, 실패의 결과까지 고스란히 스토리텔링 속에 녹여 넣습니다.

여기서 죽는다 해도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_⌣”)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일반적인 어드벤처 게임에서는 캐릭터가 의문의 인물로부터 공격받을 경우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 캐릭터가 사망하면서 ‘실패’  판정이 나오고 재플레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헤비 레인>에서는 캐릭터가 죽더라도 게임 오버 없이 다음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물론 이야기의 전개와 결말에서 해당 캐릭터는 빠진 채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공과 실패로 플레이어의 행동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조차도 플레이어의 전략적 선택으로 인식하는 겁니다.

이거 접은 놈, 꼭 잡고 만다!

 

# 플레이어가 직접 만들어가는 인터랙티브 드라마

실패가 없는 진행은 게임의 엔딩을 다채롭게 만들며, 플레이어마다 각자의 이야기가 담긴 게임 경험을 만듭니다.

같은 게임이지만, 플레이어가 임하는 방식과 성격에 따라 게임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남습니다.

아들의 웃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어쩌면 <헤비 레인>은 일종의 스토리 창작의 보조 도구와 같은 즐거움을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접 스릴러 소설을 쓰는 일은 어렵지만, 실패와 재도전이 없는 <헤비 레인>을 플레이하는 것은 나만의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가는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제각기 다른 플레이 경험은, 각자의 마음 속에 남긴 하나씩의 습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경혁 게임제작 관련업에 종사한 경험이 없는 순수 게이머 출신의 게임칼럼니스트. 게임의 매체성에 주목하며 게임비평을 통해 사회 전반에 게임의 매체성을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저서로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이 있으며, 성균관대학교에서 <게임과 인문학> 교양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게임 속 스토리텔링 #1 빛과 어둠의 대결, 앨런 웨이크

게임 속 스토리텔링 #2 매스 이펙트

게임 속 스토리텔링 #3 원숭이섬의 비밀

게임 속 스토리텔링 #4 울티마 4

게임 속 스토리텔링 #5 언더테일

게임 속 스토리텔링 #6 9월 12일

게임 속 스토리텔링 #7 버블 보블

게임 속 스토리텔링 #8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