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스토리텔링 #10 리니지 2

게임 칼럼니스트 이경혁 작가가 들려주는 게임 속 숨겨진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야기.

‘게임 속 스토리텔링’ 10편에서는 게임 역사상 유례 없는 전쟁, <리니지2>의 바츠해방전쟁에 대해 소개합니다~!

‘자유’라는 목표를 위해 10만 명의 유저가 게임 월드 내에서 약 240년 동안 펼친 투쟁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 스토리텔링, 뉴미디어를 만나다

인류는 말과 글을 처음 가진 이래로 오랫동안 이야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살아왔습니다.

태고적 동굴 안 모닥불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나누던 이야기는 시와 연극, 소설을 넘어 현대에 들어서는 텔레비전과 영화라는 새로운 영상매체로 거듭났습니다.

신기술이 열어젖힌 새로운 감각의 영역을 통해 이야기는 좀 더 뚜렷한 형태로 발전해나갔습니다.언어와 음성 언어로 전해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고전적인 방식이 사진과 영화, 텔레비전처럼 실제와 같이 움직이는 매체를 통해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변했습니다.

소설 『반지의 제왕』 속 프로도의 여정은 영화로 옮겨지면서, 관람객들에게 공통적인 인상을 남기는 하나의 여정으로 변화했습니다.

전세계인이 모두 똑같이 떠올리는 반지의 제왕에 대한 이미지

전 세계가 영화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모두 똑같이 상상할 수 있게 되었죠. 지역마다 주인공을 그리는 삽화가 다르거나, 새로운 판본으로 내용이 변경되던 소설의 시대와 차이를 보이는 지점입니다.

 

# 디지털 게임의 스토리텔링, 단일 서사로부터의 탈주

영화와 텔레비전 시대에서는 이야기가 단 하나의 서사로 전파되었다면, 디지털 게임에 도달한 스토리텔링은 영상매체가 만들었던 새로운 이야기 이상의 거대한 변화를 불러옵니다. 다시금 이야기가 개인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똑같이 <리니지 2>를 플레이한다 해도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통해 경험하는 서사는 단일하지 않습니다.

<리니지 2> 유저들이 직접 만들어나가는 게임 스토리

메인 에피소드에 따른 스토리 전개는 존재하지만, 그것이 모든 플레이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스토리 따위 관심 없어!’를 표방하는 플레이어도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 속에서 단일 서사의 의미는 축소되고, 그 빈자리는 각 플레이어들이 직접 써내려가는, 개별 서사가 차지하게 됩니다. 내가 사냥하고, 내가 모험하고, 내가 만난 것들의 이야기가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영역에 들어온 것입니다.

 

# 바츠해방전쟁, 단일 스토리텔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

<리니지 2>를 이야기할 때 어김 없이 따라오는 주제인 ‘바츠해방전쟁’은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일종의 거대 단일 서사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츠해방전쟁을 통해 수많은 이야기와 담론을 창조해낸 <리니지 2>

거대한 독재 혈맹연합이 있었고, 그에 맞서는 군소 혈맹연합이 있었으며, 사냥터 통제 문제로 빚던 갈등이 전 서버의 응원군을 불러오는 과정을 다룬 글들은 마치 ‘바츠해방전쟁’을 소설이나 영화의 그것처럼 단일한 서사로 다루곤 합니다. 하지만 정말 ‘바츠해방전쟁’은 그런 의미였을까요?

우리나라 게임사에 전설로 기록된 바츠해방전쟁

오히려 그러한 정리문들이야말로 거대 스토리텔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텍스트일뿐이지 <리니지 2>라는 게임 자체에는 해방전쟁이라고 단일하게 부를 수 있는 서사는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당시 싸움에 참여했던 개개인의 무용담과 경험은 거대 서사로 다룰 때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거대 서사로서의 ‘바츠해방전쟁’은 이른바 2차 텍스트, 게이머들의 경험을 토대로 나온 부가적인 이야기입니다.

바츠해방전쟁을 다룬 다양한 도서들 #2차텍스트 #거대서사

 

# 게임, 창작을 돕는 도구로서의 의미

‘바츠해방전쟁’에 참여했던 플레이어들은 거대 서사의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에서 게임의 재미를 찾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유저들이 전투 현장에 1레벨 캐릭터를 만들어 뛰어들게 한 힘의 원천은, 오히려 게임 플레이가 갖는 스토리텔링 창작 도구로서의 의미일 것입니다.

DK 연합과의 격돌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유저들

춤추는 법을 잘 몰라도 <펌프잇업>을 플레이하다보면 춤이 선사하는 리듬과 몸이 합치되는 순간의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의 움직임 외에 손이나 몸통의 동작들은 자신이 직접 창작해서 메꿔나가야만 합니다. (아무것도 않고 발만 움직이는 분도 계시긴 합니다. ^^)

춤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아도 춤을 출 수 있게 만들어주는 <펌프잇업>의 사례처럼, <리니지 2>에서 ‘바츠해방전쟁’에 참가했던 이들은 자신이 참전을 결심하고 싸워 나가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와 역사가 만들어지는 경험을 얻게 됩니다.

수많은 유저들이 스스로 참여해 이끌어 낸, 투쟁과 성취의 스토리! 

소설을 쓰는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갈 때의 희열을 맛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10만 명의 유저가 플레이한 경험은 단일한 거대 서사가 아닙니다. 각각의 플레이어가 공통의 목표와 성취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힘겹게 투쟁하여 얻어낸 값지고 의미 있는 스토리입니다.

미디어 기술의 발전이 이끌어 온 스토리텔링의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점은,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수용이 아닌 창조하는 플레이어를 탄생시킨 바로 지금입니다.

바로, 당신 자신의 이야기가 있는 지금 말입니다.


이경혁 게임제작 관련업에 종사한 경험이 없는 순수 게이머 출신의 게임칼럼니스트. 게임의 매체성에 주목하며 게임비평을 통해 사회 전반에 게임의 매체성을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저서로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이 있으며, 성균관대학교에서 <게임과 인문학> 교양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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