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RPG의 위대한 계보 #2 1995, 창세기전과 화려했던 도스의 추억

한국 게임 시장은 한 마디로 RPG의 역사라 봐도 무방합니다. 한국 게이머들만큼 RPG 장르를 좋아하는 민족(?)은 없을 겁니다. RPG 장르는 불모지나 다름 없던 한국 게임 시장을 일으켰고, 한국이 온라인 게임 강국으로 도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도 RPG가 대세를 이루고 있죠. 그만큼 한국 게임에서 RPG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한국의 RPG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했을까요? 한국 게임의 역사와 함께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게이머들과 함께 했던 국산 RPG의 흥망성쇠를 짚어보겠습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발매된 지 1년 후, 또 하나의 걸작이 등장합니다. 바로 창세기전이죠.

창세기전은 한국 게이머들이라면 한번쯤은 즐겼거나 혹은 이름이라도 들어봤을 법한 국산 RPG의 상징 같은 시리즈입니다. 1995년 소프트맥스에서 제작하고 하이콤에서 출시한 창세기전은 한국 게임시장에 블록버스터 시대를 가져온 작품입니다. 앞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국산 RPG의 길을 열었다면, <창세기전>은 그 길을 넓혀 탄탄대로를 만들었죠.

<창세기전>은 국산게임으로는 최초로 시뮬레이션 RPG를 표방했고, 방대한 스케일과 아기자기한 게임성을 두루 갖춘 명작입니다. <창세기전> 1편은 <바람의 나라>로 유명한 만화가 김진 씨가 일러스트를 맡아 당시로선 최고 수준의 그래픽을 보여주었죠. 특히 ‘TP시스템’으로 대표되는 전략성 높은 전투 시스템은 턴제 RPG의 참맛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죠.

 

한국 RPG의 상징적 작품으로 통하는 창세기전 시리즈. 가장 한국적인 감성을 담아낸 고전 명작.

 

그 겨울의 신화, 창세기전 1, 2

창세기전 시리즈가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감성적인 스토리죠.

가상의 안타리아 대륙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이 벌이는 사랑과 우정, 비극의 서사시는 한편의 장편 소설을 보는 듯 합니다. 보조 캐릭터까지 합치면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100여명이 넘을 정도로 방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메인 스토리뿐만 아니라 숨겨진 에피소드까지 모두 플레이 하면 족히 70~80 시간이 걸리죠.

하지만 <창세기전>은 방대한 스토리를 매끄럽게 완결하지 못한 채 미완으로 종결됐습니다. 늘어나는 인물과 사건을 한편으로 담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죠.

 

<창세기전>

바람의 나라로 유명한 김진 작가가 일러스트를 맡았다.

여담이지만 창세기전 시리즈를 통해 유명 일러스트레이션들이 다수 배출됐다. 템페스트의 토니, 창세기전3의 김형태씨가 대표적.

 

미완의 이야기는 1996년 출시된 <창세기전2>에서 대단원의 결말을 맺습니다.

<창세기전2>는 게이머들에게 ‘창세기전’이란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죠. ‘창세기전2의 엔딩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역대급 스토리를 보여주었죠.

전작에서 미흡했던 콘텐츠를 재정비하고 날씨와 같은 요소를 도입해 더 완성도 높은 게임으로 나왔습니다. 특히 주인공 ‘이올린’과 흑태자 ‘칼스타이너’의 비극적인 사랑이 그려진 엔딩 신은 국내 게임사에 길이 회자될 명장면이죠.

 

<창세기전 2>

이올린의 품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흑태자의 엔딩신은 한국 게임역사상 최고의 장면으로 손꼽힙니다.

 

<창세기전>은 실제 역사적 사실을 비롯해 많은  소설, 영화, 등에서 모티브를 따와 스토리의 얼개를 엮고, 여기에 더해 이야기에 한국적 한의 정서를 담은 작품이죠.

<창세기전2>의 엔딩이 주는 감동과 여운은 창세기전 시리즈를 당대 최고의 게임반열에 올렸습니다. <창세기전2>는 국내 게임으로는 초유의 5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창세기전>은 이후 외전 격인 <서풍의 광시곡>, <템페스트>에 이어 <창세기전 3> 2부작까지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최고의 국산 RPG로 군림하게 됩니다.

 

불붙은 라이벌 전, 포가튼 사가의 명과암

1990년대 한국 게임시장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손노리와 <창세기전>의 소프트맥스, 두 라이벌이 격돌한 시장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회사의 작품들은 성격이 완전 달랐죠. 손노리 게임들이 가볍고 유쾌한데 반해, 소프트맥스 작품은 무겁고 진지한 면이 강했죠. 그만큼 작품을 고르는 유저들의 선택의 폭도 늘었습니다.

창세기전의 엄청난 성공은 RPG의 맏형 격인 손노리를 자극했습니다. <창세기전2>가 게임 시장을 휩쓴지 1년 후, 손노리는 신작 <포가튼 사가>를 내놓았습니다.

<포가튼 사가>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정식 후속작이라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관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포가튼 사가>는 한국 RPG 역사에 있어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작품 중 하나로 남게 되죠. ‘국산 RPG의 혁신적인 작품’이라는 찬사와 함께 ‘발매 연기와 버그투성이의 졸작’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은 게임이었죠.

 

<포가튼 사가>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자, 논란의 중심에 섰던 비운의 작품이다.

 

<포가튼 사가>는 시작부터 파격이었습니다. 기존 일본식 RPG 룰을 깨고 방대한 시나리오와 높은 자유도를 내세워 한국 RPG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죠. 동료를 누굴 선택하느냐, 플레이 타임이 얼마나 되었느냐, 이벤트를 어떻게 진행했느냐에 따라 볼 수 있는 이벤트가 달라졌죠. 자유도를 중시하는 서양식 RPG와 스토리 위주의 일본식 RPG의 장점을 섞어 한국 RPG만의 고유한 특성을 정립했습니다. 이후 등장한 한국 MMORPG 시스템에 많은 영향을 준 작품이기도 하죠.

<포가튼 사가>는 그 혁신적인 모습만큼 한국 RPG의 고질적 한계를 보여준 작품입니다.

먼저 역대급 버그로 유저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발매 후 몇 번의 패치가 나오고 나서야 겨우 엔딩을 볼 수 있었을 정도로 게임은 지독한 버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버그 문제는 국산 RPG에 있어서 풀어야 할 숙제이자 씻지 못할 낙인이라고 할 수 있죠. 손노리는 <포가튼 사가>의 실패로 주춤했고, 유저들의 기대는 매년마다 출시되는 창세기전 시리즈에 쏠렸습니다.

 

<포가튼사가2>

<포가튼 사가2>는 MMORPG로 제작됐으나 큰 인기를 끌지 못하고 서비스 중단됐다.

 

패키지의 황혼과, 온라인의 여명

<포가튼 사가>는 도스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게임입니다(도스와 윈도우 판으로 함께 출시). 비록 아쉬운 점이 많았던 작품이었지만 그 혁신적인 실험성은 이후 많은 게임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국내 PC환경이 윈도우와 인터넷 기반으로 재편되면서 한국 RPG는 전에 없던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선 패키지 RPG의 황혼과 MMORPG의 태동이라는 거대한 세대교체의 물결이 몰아치고 있었죠. 다음 편에서는 윈도우 시대 패키지 RPG의 마지막 세대들과 MMORPG 개척자들을 알아보겠습니다.

 

부록) 그 외 도스 시절 한국 RPG명작들

<이스2 스페셜>(1994)

일본 팔콤사의 명작 RPG <이스2>를 국내에서 리메이크한 게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함께 국내 RPG붐을 조성 했던 게임이다. 단 수많은 버그와 원작과 다른 스토리 진행으로 기존 이스팬들의 비판을 받았던 작품.

 

<신검의 전설2 – 라이어> (1995)

최초의 국산 RPG  <신검의 전설>의 후속작. 울티마7을 오마주 한 작품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흥행엔 실패했다.

 

<포인세티아> (1995)

전형적인 일본식 RPG로 <파이널 판타지>를 연상시키는 전투시스템과 아이템 조합시스템이 특징.

 

<프로토코스 : 신들의 예언서> (1995)

당시로는 고해상도의 그래픽과 화려한 애니매이션으로 입소문을 탄 일본식 RPG.

 

<망국전기-잊혀진 나라의 이야기> (1995)

홍길동전 이후 이야기를 다룬 작품. 적대마인과 그 수하들이 나타나 율도국이 위기에 처하면서, 홍길동의 손자 홍세영이 율도국을 지키기 위한 모험을 다룬 게임.

한국적인 소재에 멀티엔딩을 도입한 부분이 특징이다.


이덕규(게임 칼럼니스트) 게임잡지 피시파워진 취재부 기자를 시작으로 게임메카 팀장, 베타뉴스 편집장을 거쳐 현재 게임어바웃 대표 및 게임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게임을 단순한 재미로 보기보다, 게임의 문화적 가치를 살리는데 관심이 많다. 고전부터 최신 게임까지 게임의 역사를 집필하면서 게임을 통해 사회를 보는 창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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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는 한 명의 고등학생에서부터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