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RPG의 위대한 계보 #3 디아블로 쇼크와 변화하는 한국 RPG

윈도우시대, 변화의 바람에 직면하다

1997년, 윈도우가 고용량 CD롬과 컬러 그래픽 등 컴퓨터 하드웨어 성능 발전을 견인하면서 도스의 시대는 저물고 윈도우 시대가 본격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최초의 국산RPG <신검의 전설>이 나온 지 10여년 만에 국산 RPG 시장은 또 한번 격변기를 맞이합니다. 바로 세대교체의 광풍이 몰아친 것이죠. 낡아 빠진 도스 시대의 영광은 사라지고, 윈도우 환경에 적응한 새로운 게임들이 속속 등장했던 시기였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작품들은 도태되기 시작했습니다. 미흡한 완성도로 게이머들을 실망시켰던 <다크니스>, <운명의 길>, <신> 등이 잇달아 실패했고, 당시 최고의 게임사였던 미리내의 두 번째 RPG <고룡전기 퍼시벌> 역시 지루한 게임전개와 무너진 밸런스 등으로 흥행에 참패했죠.

<퍼시벌>
RPG 고룡전기 퍼시벌. 이 게임의 실패로 1세대 개발사의 대표주자였던 미리내는 문을 닫게 된다.

 

1세대 개발사들의 몰락과 세대교체의 광풍

막고야, 미리내, 소프트액션 같은 소위 1세대 게임개발사들은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였고 결국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게임업계를 대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미리내의 몰락은 당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죠. 미리내는 <그날이오면>, <망국전기> 등 한국 게임사의 초석을 놓은 게임들을 만든 상징적인 개발사입니다. 하지만 잇단 기대작들의 실패로 결국 1998년 회사를 닫게 됩니다.

미리내에서 만들었던 <그날이 오면(좌)>, <망국전기(우)>

반면 최신 기술력과 참신한 감각을 갖춘 신생 개발사들도 속속 등장했습니다. 대표적인 게임사가 드래곤플라이죠. 드래곤플라이는 지금은 FPS <스페셜포스>로 유명하지만 본래 RPG 전문 개발사로 출발했습니다. 첫 작품 <운명의 길>이 망한 이후 절치부심한 드래곤플라이는 <카르마: 불멸의 분노>로 재기에 성공합니다. <카르마>는 윈도우 환경에 맞춰 그래픽을 혁신했습니다. 국산 RPG로는 처음으로 풀3D 그래픽을 채택했죠.

<카르마(좌)>, <카르마2(우)>
풀 3D로 제작된 카르마. 당시 신생개발사였던 드래곤플라이의 놀라운 기술력이 엿보인다.

캐릭터와 배경이 완전한 3D로 구현되어 당시 게임들에 비해 엄청난 비주얼적 완성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한국게임의 고질적 문제였던 버그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게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드래곤플아이는 <카르마>의 3D 그래픽기술력을 이용해 FPS <카르마 온라인>을 만들었습니다. 이 게임이 훗날 국내 FPS 시장의 전성기를 가져온 <스페셜포스>의 전신이기도 하죠.

재미시스템의 <아트리아 대륙전기>도 이 시대를 이끈 신세대 타이틀이죠. <아트리아 대륙전기>는 등장인물의 대화를 음성으로 처리했는데 이는 한국 RPG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죠. 무엇보다 혁신적인 것은 전투가 완전한 액션 아케이드로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국산 액션RPG의 틀을 놓은 작품이죠. 게임은 호쾌한 전투 시스템 덕분에 흥행에서도 나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트리아대륙전기>

우리도 영웅전설 같은 감성RPG를 만들 수 있을까?
아트리아 대륙전기 RPG와 액션을 조합한 독특한 게임성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블리자드발 악마의 게임 디아블로 쇼크! 액션RPG로 가자

변화의 바람은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블리자드가 개발한 <디아블로>가 세상에 나온 것이죠. 사실 저에게 세계 RPG 역사를 둘로 나누라고 한다면, 디아블로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죠. <디아블로>가 선보인 액션RPG의 재미는 그야말로 어마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기존 턴제 RPG에선 상상도 못할 빠르고 다이내믹한 전투가 펼쳐졌죠. 당연히 국내 개발사들도 발 빠르게 액션RPG를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아블로>
블리자드가 개발한 디아블로는 RPG장르를 넘어 게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버렸다.
한국의 디아블로 키드들은 수많은 오마주 작품을 내놓았고, 이런 움직임이 게임시장을 변화시켰다.

 

가장 유명한 국산 액션 RPG로는 코룸 시리즈가 있습니다. 시리즈 전체 4편까지 출시됐고, 이후 온라인게임으로 리메이크 될 정도로 장수한 타이틀입니다. 1편은 어설픈 게임으로 비판 받았지만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완성도를 높였죠. <코룸 3>의 성공 이후 <코룸 외전: 이계의 강림자들>까지 코룸 시리즈는 ‘한국의 디아블로’라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코룸 1(좌)>, <코룸 3(우)>
국산 액션RPG의 대표작 코룸 시리즈. 1편은 어설 게임성으로 비난 받았지만,
이후 시리즈의 완성도를 높여 3편에선 극찬을 받았다.

 

트리거소프트의 <퇴마전설>도 강렬한 인상을 준 작품이죠. <퇴마전설>은 게임 방식이나 분위기가 디아블로와 너무 흡사해 ‘디아블로의 아류작’이라는 비난도 많이 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게임 외적인 부분일 뿐 실제 해보면 <퇴마전설>만의 독특한 시스템이 많았습니다. 여러 캐릭터를 마치 RTS처럼 동시에 조종해 진행하는 전투시스템과 동양적인 판타지 세계관으로 유저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퇴마전설>은 나름의 게임성을 인정받으며 큰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하지만 2001년 출시된 <퇴마전설2>는 전작 우려먹기라는 비판을 받게 되죠.

<퇴마전설>

트리거소프트의 퇴마전설. 디아블로 짝퉁이란 비판도 많았지만, 실제로는 독특한 시스템이 많은 게임.

창세기전 절대왕정의 시대

1990년대 중반, 격동의 시대 맞아 한국 RPG들은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성장해왔죠. 하지만 이런 변화의 물결에도 끄덕 없는 절대왕정(?)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창세기전 시리즈였습니다. <창세기전2>가 출시된 1996년부터3편이 나온 1999년까지, 한국 RPG 시장은 그야말로 창세기전에서 시작해서 창세기전으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창세기전>

한국 RPG사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창세기전. 1996년~2000년까지 5년간의 RPG시장은 창세기전 절대왕정의 시대였다.

<창세기전2>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소프트맥스는 엄청난 계획을 실행합니다. 매년마다 창세기전 시리즈를 발매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죠. 사실 게임 하나를, 그것도 창세기전 같은 대작을 매년 발매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야말로 개발자들의 인생과 노력을 갈아 넣어야 하는 강행군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도전에서 권좌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이후 국산 RPG 종말의 원인 중 하나였던 버그 사태는 바로 이러한 척박한 개발 환경에서 싹을 내리게 되죠.

그 당시 개발자들의 척박한 개발 환경을 굳이 비유해 보자면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창세기전 신작이 매년마다 나온다는 사실에 팬들은 환호했습니다. 1998년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은 그런 기대감을 한 몸에 안고 출시됐습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대박’이었습니다. 먼저 게임은 혁신적인 변화를 보여줬습니다. SRPG인 전작과는 달리 정통 일본식 RPG장르를 표방 했습니다. 스토리상 분명한 후속작이지만 정식 넘버링이 아닌 외전으로 발매된 이유도 이런 시스템적 변화 때문이죠.

<서풍의광시곡>

서풍의 광시곡의 한 장면. 지금 보면 오글거리는 이런 대사도 그때는 참 가슴을 울렸다.

장르가 바뀐 만큼 스타일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전작이 전쟁이라는 큰 사건 속에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서사시라면, <서풍의 광시곡>은 철저히 주인공 ‘시라노’의 개인적 복수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스토리는 알렉산더 뒤마의 장편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원작으로 하고 있죠(복수극의 교과서적인 작품).

<시라노>

서풍의 광시곡 주인공 시라노 번스타인. 개인적으로 한국RPG 중 가장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캐릭터가 아닐까한다.

특히 국산 게임의 그래픽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고해상도 그래픽은 팬들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습니다. 게임 후반부에 등장하는 거대 마장기의 전투 영상은 ‘국산게임이 이 정도까지 발전했구나’라고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뛰어났죠.

서풍의 광시곡에 등장하는 1급 마장기 아스카론 전투 영상 (영상 출처: 소프트맥스 유투브)

 

템페스트의 유쾌하지 않은 속사정

<서풍의 광시곡> 이후 1년도 안되어 출시된 차기작 소식에 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창세기전 외전 2 템페스트>는 전작과 같은 해 발매됐습니다. 몇 년에 하나 만들기도 힘든 장르가 RPG인데 창세기전 같은 대작 RPG를 한 해에 두 개나 내놓다니요. 그래도 소프트맥스는 보란 듯이 이 무모한 계획을 실현했습니다.

 

<템페스트>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패키지 디자인. 딱 봐도 창세기전이 아니라 연애시뮬레이션 같다.

스토리도 완전 달랐습니다. 전작 <서풍의 광시곡>에서 조연으로 나왔던 샤른호스트(클라우제비츠)의 시점에서 총 9명의 여자 캐릭터들을 성장시키는 게임입니다. 기본적으로 SRPG에 연애, 육성요소까지 가미해 전에 없는 복합장르를 보여주었죠. 특히 게임에 나오는 여자캐릭터의 매력이 단연 최고였습니다. <템페스트> 또한 기존 시리즈처럼 흥행에 성공했죠.

하지만 <템페스트>의 속사정을 알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사실 <템페스트>는 창세기전이 아닌 전혀 다른 작품으로 기획된 게임이었습니다. 애초에 개발진은 다소 무거운 창세기전에서 벗어나 풋풋한 연애시뮬레이션을 만들려고 했었죠. 하지만 현실은 새로운 도전을 허락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습니다.

1998년은 IMF 한파가 한창일 때였죠. 대기업도 견디기 힘든 시절, 소프트맥스 같은 벤처기업들은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회사가 살아남으려면 흥행이 보장된 창세기전을 또 내놔야 했습니다. 회사 경영진은 이 신작 프로젝트를 창세기전 프로젝트로 돌려버렸습니다. 주인공 캐릭터를 창세기전 캐릭터로 급조하고 여러 시스템을 이어다 붙였죠. 때문에 여러 장르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한데다 게임의 진행이 전체적으로 산만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시도도 좋지만 어쨌든 회사의 위기는 넘겨야 했으니까요.

그래서일까? 스토리만큼이나 외형이 크게 바뀐 샤른호스트(클라우제비츠)

 

1999,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다

위기를 넘긴 창세기전은 1999년 정식 넘버링 <창세기전3>로 왕좌의 자리를 굳힙니다. 3편은 <창세기전2> 시스템을 계승 발전시켜 더욱 화려한 게임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등장인물과 그에 따른 스토리도 엄청나게 방대해졌죠. 당연히 흥행에 성공했고, 이듬해 나온 <창세기전3 파트2>로 연타석 홈런을 치게 됩니다. 창세기전 덕에 개발사 소프트맥스는 게임회사로는 최초로 코스닥에 상장되는 영광을 누리죠.

<창세기전3>
창세기전3 최고의 명장면.
이올린과 흑태자의 폭풍도 라스트씬 이후, 길이 회자되고 있는 살라딘, 셰라자드의 마지막 장면.
이거 보고 얼마나 멘붕 당했었나….

 

그러나 이런 찬란한 영광도 잠시, 한국 RPG 시장에 종말의 시간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치 빙산에 부딪혀 가라앉은 타이타닉처럼 비극은 모두가 샴페인을 터뜨리는 그 순간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죠. 종말은 신호는 소프트맥스가 그렇게 만들고 싶었던 창세기전 아닌, 새로운 신작에서 시작됩니다. 다음 회에선 한국 RPG의 종말과 MMORPG의 시작을 다뤄보겠습니다. 

이덕규(게임 칼럼니스트) 게임잡지 피시파워진 취재부 기자를 시작으로 게임메카 팀장, 베타뉴스 편집장을 거쳐 현재 게임어바웃 대표 및 게임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게임을 단순한 재미로 보기보다, 게임의 문화적 가치를 살리는데 관심이 많다. 고전부터 최신 게임까지 게임의 역사를 집필하면서 게임을 통해 사회를 보는 창을 제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