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심리학 #3 은유로서의 게임

심리학의 관점에서 현 시대의 게임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게임과 심리학’.

문화심리학자 이장주 박사가 들려주는 ‘게임과 심리학’ 3편에서는 게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심리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 없는 마차’. 이것은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당시 사람들이 자동차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서양 무당’은 선교사를 처음 본 조선 사람들이 이방인 선교사를 부르는 이름이었습니다. 이렇듯 한 종류의 대상을 다른 종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여 표현하는 어법을 은유(metaphor)라고 합니다.

 

# 사고체계의 기반이 되는 은유

사람들은 늘 숨을 쉬고 살지만 공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합니다. 은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유는 언어의 수사법을 넘어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는 무의식적 바탕’이라고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교수는 주장합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 교수

은유가 사고체계의 기반이기에 우리는 이것을 은유라고 인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게임은 어떤 은유를 사용하고 있을까요?

은유에 대한 이해를 위해 ‘시간’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시간은 돈’이라는 말은 은유입니다. 시간을 돈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간 절약’이나 ‘시간 낭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돈이 아닙니다. 시간을 돈처럼 은행에 저축하고 필요할 때 되찾아 풍족하게 쓸 수 없습니다.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하지만, 시간이 많은 실업자나 은퇴자를 ‘시간 부자’라고 부러워하지 않죠.

이처럼 시간과 돈은 속성상 약간의 공통점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을 돈이라 철석 같이 믿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은유는 문화가 됩니다.

시간은 돈이다, 돈이 아니다? #은유의_문제

 

# 문화적 실행성을 지닌 은유

프랑스 태생 정신분석학자 클로테르 라파이유(Clotaire Rapaille)는 프랑스 사람이 생각하는 식사와 미국 사람이 생각하는 식사의 무의식적 은유가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식사를 마치 ‘주유소에서 연료를 넣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간을 들이거나 비싼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낭비라고 여기죠. 이것이 미국에서 패스트푸드가 발달하게 된 배경이라 설명합니다.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에서 생쥐 요리사 레미의 아버지가 레미를 훈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음식은 연료에 불과해. 연료 가지고 까다롭게 굴면 엔진은 멈춰버리고 말아.” 음식에 대한 전형적인 미국식 은유입니다.

음식은 연료에 불과해 #라따뚜이

반면 프랑스에서는 식사를 ‘악기 연주’로 생각합니다.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는 것이 삶에서 매우 가치 있는 행위인 겁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패스트푸드가 정착하기 어려운 문화적 배경이 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보기에 패스트푸드는 음식이 아니라 위를 채우는 ‘사료’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이렇듯 은유는 단지 사고 방법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사 시간이나 방법과 같은 문화적 실행성을 갖게 됩니다.

 

# 게임이 지니고 있는 은유

그렇다면, 게임 문화에 있어 게임은 어떤 은유를 가지고 있을까요?

저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은유가 ‘게임 중독’입니다. 게임을 마치 마약이나 술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지요. 게임에 빠지거나, 게임을 절제한다는 표현은 마약이나 술의 은유를 사용하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_-

시간이나 관심을 오로지 그것에 쏟아 붓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 외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습니다. 게임을 지나치게 하는 사람과 마약이나 술에 중독된 사람을 함께 놓고 구분하라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금방 맞힐 수 있겠죠. 오히려 공통점을 찾기 어렵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에 대한 이런 은유가 오랜 세월 지속되다보니, 은유를 현실로 착각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게이머에게 마약이나 술이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과 같은 증거를 찾아내려고 뇌 사진을 찍습니다.

마치 시간을 돈이라고 착각한 사람이 시간이 풍족한 실업자의 집에서 많은 돈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돈이 많은 실직자는 착각을 진실이라 믿게 만드는 실증적 증거로 활용됩니다. 그리곤 다른 실직자들에게도 돈이 있으리라 착각하고, 이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조직에게 실행성을 발휘하게 하고 예산을 만들어내죠.

지금 엉뚱한 데 보고 짖고 있는 거, 아시죠?

 

# 은유를 바꾸면 인식이 변한다

문화를 바꾸는 한 방법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유를 바꾸는 겁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처럼 ‘게임중독’이란 비현실적인 은유를 대체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대안적인 은유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활동을 레이코프 교수는 ‘프레임’ 전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게임은 중독물질이 아니다.’라는 증거를 찾기 위한 연구나 ‘건전한 게임 문화’와 같은 캠페인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킵니다. 마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 더욱 더 선명하게 코끼리가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인 원리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주장이 아니라는 반박은, 그 주장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맥락으로 해석해보면, 건전 게임 문화 캠페인은 역설적으로 ‘게임 중독’ 프레임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임은 현재 어떤 은유를 사용하고 있을까요? 은유를 탐색하려면 사용하는 용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게이머를 ‘유저(user)’라고 부릅니다. 게임을 다루는 법률과 기관에서는 ‘게임물’이라는 단위로 게임을 ‘관리’합니다. 물건을 관리하듯이 말입니다.

이런 용어 속에 게임은 ‘물건’이라는 은유가 깔려 있습니다. 그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는 ‘물건’을 구매하는 ‘소비자’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소비자 보호’를 하듯 ‘이용자 보호’를 하기도 하지요. 게임을 ‘문화 산업’이라고 부르지만 방점은 ‘산업’에 있습니다. 창작이 아닌 ‘제조’를 하는 산업 말입니다.

게임 산업에서는 자동차, 철강, 반도체 같은 산업과 비교해서 얼마의 매출을 거두었는지, 특히 수출액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거칠게 요약해보면, 게임 문화와 산업은 형태가 바뀌었을 뿐 20세기 중반 공급자 중심의 제조업이란 은유를 벗어나고 있지 못합니다. ‘종합 예술’로서의 게임에 대한 은유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문화적 맥락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떤 프레임을 가졌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이듯,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 게임은 예술이다

‘게임은 예술’이라는 은유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관행적으로 부르는 이름을 먼저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접속 화면의 첫 번째 작업은 자신의 정체성을 각인하는 중요한 과업입니다. 상대가 초면에 나를 어떻게 부르느냐가 다음 기분을 좌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ID’라는 명칭을 바꾸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임을 즐기러 들어가는 것이 마치 회사에 출근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대안적으로 ‘작가(author)’나 ‘창작자(creator)’란 명칭으로 입장을 한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런 맥락은 생산자의 측면에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게임대상’ 같은 각종 어워드에서 게임 ‘개발사(developer)’가 아니라 게임 ‘출품사(Exhibitor)’로 명칭을 바꾸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똑같은 게임이어도 강조하는 대상에 대한 초점이 분명하게 달라집니다.

게임을 즐기는 당신은 작가이자, 크리에이터입니다

이름만 바꾼다고 달라지는 게 있겠냐구요? 분명히 있습니다. 리버만(Liberman) 팀의 2004년 연구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죄수 딜레마 게임’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가에 따라 협력과 배신의 비율이 아래 그림에서처럼 2배 차이가 난 것인데요. 한쪽 집단은 ‘공동체 게임(Community Game)’으로 이름을 붙이고, 다른 집단은 ‘월스트리트 게임(Wall Street Game)’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실험은 부르는 용어에 따라 게임에 대한 무의식적 은유가 달라짐을 보여줍니다. 월스트리트 게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경우 훨씬 더 배신의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쟁의 은유가 자리잡았기 때문으로 연구자들은 해석합니다.

그리고 또한, 심지어 평소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사람조차도 ‘공동체 게임’이라는 이름에서는 협력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이름은 은유를 만들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리버만 팀의 ‘죄수 딜레마 게임’ 실험 결과[1]

게임이 예술 장르로 여겨지기 위해서는, 최고의 게임 작품 그 자체보다 그 게임을 아름답거나 혹은 웅장하게 구현한 ‘플레이어’에 더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게임 광고나 영상에 있어, 누군가의 황홀한 플레이를 보고 ‘나도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술이 된 겁니다. 마치 뛰어난 연주자나 화가의 작품에 전율해 본 사람이 그 영역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이런 날이 온다면, 게임에 대한 인식 변화를 위한 캠페인의 이름은 ‘건전한 게임’이 아니라 ‘아름다운 게임’일거라 믿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게임들이 많이 창작되고, 그런 게임에 흠뻑 빠져 즐기는 사람이 많은 나라가 진정한 게임강국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게임강국이 저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참고 문헌

[1] Liberman, V., Samuels, S. M., & Ross, L. (2004). The name of the game: Predictive power of reputations versus situational labels in determining prisoner’s dilemma game moves.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30(9), 1175-1185.


이장주 문화심리학자. 평범한 사람들이 더 활력 있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다가 게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재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심리학의 관점에서 문화적 이슈를 다루는 글쓰기와 강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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