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RPG의 위대한 계보 #9 마지막 빅3 전쟁, 침몰하는 배를 지킨 작품들

아이온 성공 이후 한국 RPG의 대형화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었습니다. 자본과 인력이 받쳐주지 못한 게임들은 시장에 나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웬만한 대작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는 쏠림 현상이 심해졌습니다. 제작비 몇 백억 정도는 우습게 여길 정도였죠. 게임사 입장에서도 리스크가 컸습니다.

작품 하나가 실패하면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로 위험부담이 컸죠. 그러다 보니 실험적인 작품보다 여기저기 흥행 될 만한 요소를 붙여 만든 양산형 게임들이 늘어나게 된 거죠. 그래픽만 다를 뿐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게임들이 유저들의 피로감만 키웠습니다. 하지만 대작 RPG 개발 붐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MMORPG라는 배는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빅3 격돌!

‘아이온’이 흥행하면서 한국 RPG 시장은 잠시 침체기에 들어갔습니다. ‘드래곤볼 온라인’, ‘아르고’, ‘패온라인’ 등 수십개의 게임들이 나왔지만 이렇다 할 만한 뒷심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리니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아이온’ 3인방 외에는 살아남는 타이틀의 거의 없었죠. 영화로 따지면 흥행작 ‘아바타’ 이후 당분간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주춤한 것과 마찬가지죠.

아이온 이후, 대세를 잡기 위해 출사표를 낸 드래곤볼 온라인과 패온라인.
하지만 흥행에 실해하고 조기 종영하고 맙니다.

 

유저들 사이에서도 실망스러운 신작에 매달리기 보다, 속 편하게 하던 게임이나 하자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럴수록 MMORPG에 대한 피로감과 매너리즘이 심해졌죠. 오히려 MMORPG 부재의 틈새를 노려 게임에 액션을 특화한 MORPG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MMORPG처럼 풍부한 볼륨감은 없지만, 액션과 캐릭터성 하나는 확실히 챙기며 나름 흥행했죠. NHN의 ‘C9’, 넥슨의 ‘마비노기 영웅전’ 등 괜찮은 MORPG들이 이때 나왔습니다.

2010년 이후 한국 RPG 시장은 다시 한번 술렁였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대작 열풍으로 게임계는 잔뜩 흥분해 있었죠. 마지막 빅3 타이틀로 불리는 대작들이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블루홀의 ‘테라, 엑스엘게임즈의 ‘아키에이지’, 그리고 엔씨소프트의 ‘블레이드앤소울’이었죠. 이들 게임 3인방은 지금까지 쌓아온 한국 MMORPG의 노하우와 기술력, 자본력과 인력을 집대성한 완성형 게임들이었죠. MMORPG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어야 하는 큰 숙제를 안고 세상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마지막 빅3 전쟁이 시작된 것이죠.

마비노기 영웅전과 C9.
MMORPG의 맛을 살리면서 액션 부분을 특화 시킨 MORPG 장르도 인기였죠.

 

 

무서운 신인 테라, 제도권에 맞서다

시장의 침묵을 깨운 첫번째 타이틀은 ‘테라’였죠. 개인적으로 테라를 만든 블루홀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가 탁월한 개발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은 상황에서 ‘테라’나 ‘배틀 그라운드’ 같은 걸출한 작품을 내놓았으니까요.

당시 괴물신인 블루홀이 홈페이지에 올린 ‘테라’의 첫 스크린샷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언리얼 엔진으로 구현한 게임배경은 전에 없는 최고의 비주얼을 보여주었죠. 아무리 이름도 못 들어본 신인 개발사가 이정도 퀄리티를 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죠.

한국 MMORPG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테라.
게임성 면에선 지금도 최고의 MMORPG로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테라’는 제도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2011년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해 ‘테라’는 게임의 흥행을 넘어 시장을 변화시킬 강력한 힘을 가진 작품이었습니다. 화려한 그래픽은 물론, 논타게팅 방식의 호쾌한 액션은 유저들을 단숨에 매료시켰습니다. 게임 자체로 보면 누가 봐도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테라’는 당연히 성공가도를 달렸습니다. 업계에선 ‘와우’, ‘아이온’을 대체할 타이틀이 나왔다고 흥분했습니다.

하지만 기세 등등한 테라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죠. 역시나 가장 큰 문제는 콘텐츠 부족이었습니다. 한국 유저들의 플레이 속도에 맞추다 보니 항상 콘텐츠 부족의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밖에 직업간 밸런싱 붕괴, 부실한 스토리, 서버 불안정과 운영미숙 등 복합적인 문제로 많은 유저들이 게임을 떠났죠.

게다가 ‘아키에이지’, ‘블레이드앤소울’, ‘검은사막’ 등 대작들이 줄줄이 나오면서 상대적으로 시장에서 밀려나게 됐죠. 결국 일부 고렙유저들의 그들 만의 리그로 남다가 2016년 넥슨에 이관되어 현제까지 서비스 중입니다. 하지만 초창기 그 패기 넘쳤던 게임의 모습은 지금 찾아볼 수 없게 됐죠.

 

아키에이지, 미완으로 끝난 자유도 꿈

두번째 대작은 엑스엘게임즈의 ‘아키에이지’입니다. 리니지를 만든 송재경이 엄청난 규모의 RPG 세계를 만든다는 자체만으로 게임에 대한 기대는 상상 이상이었죠. 오픈 전 CBT때도 엄청난 반응을 얻으며 유저들이 폭주했습니다. 일부 열성 유저들 사이에선 CBT 계정까지 돈 주고 거래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생길 정도였죠.

아키에이지는 샌드 박스 게임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게임입니다. 캐릭터와 액션을 살린 테라와는 달리 게임 속 무한한 자유도를 강조했죠. 그만큼 최고의 디테일을 보여준 게임이죠. 유저들은 게임안에서 정말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퀘스트나 전쟁은 물론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드넓은 바다로 항해를 나가 해적을 소탕하는 등 방대한 콘텐츠를 구현했습니다. 아키에이지는 전투나 정치 외에 경제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MMORPG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구현하려 했던 아키에이지.
한국 MMORPG 역사상 가장 큰 그림을 보고 만들어진 게임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캐릭터의 노동력 시스템이나 토지를 사고 파는 부동산 시스템 등 독특한 시스템들이 많았죠(보유한 토지만큼 토지세를 내야 한다는 개념자체가 정말 참신했습니다). 하지만 아키에이지는 세간의 기대와는 달리 초반부터 삐걱거렸습니다. 우선 방대한 콘텐츠만큼 버그도 많았습니다. 게임의 밸런싱 마저 파괴할 정도로 치명적인 버그도 있었습니다.

수십만의 동접자가 몰리면서 그에 따른 버그도 곳곳에서 튀어나왔습니다. 하루가 멀다 않고 팡팡 터지는 버그에 일일이 대처하기도 힘에 부쳤죠. 게임에서 자랑했던 시스템들도 호불호가 갈렸습니다. 노동력 시스템은 고렙 유저들에게 거추장스러운 제한으로 전락했죠. 무력과 재력은 다 있는데 노동력이 부족해 불편을 겪는 일이 많았죠.

동대륙과 서대륙의 대규모 전쟁은 물론 땅을 매입해 농사 짓는 등 정말 다양한 콘텐츠가 있었죠.

 

또 부동산 시스템은 게임 속 부동산 투기가 과열되면서 게임의 밸런싱을 파괴한 원인이 됐죠. 아키에이지는 큰 그림을 보고 만들어진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원대한 포부는 잦은 시스템 버그와 운영미숙 등의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죠. 지금은 게임 속 버그와 불합리한 시스템들이 대부분 고쳤지만 예전 인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블레이드 앤 소울, 독보적인 스토리텔링

마지막 빅3 전쟁의 방점을 찍은 게임은 엔씨소프트의 ‘블레이드 앤 소울(이하 블소)’ 이었습니다.블소는 당시 대작게임의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파격적인 작품입니다. 우선 서양식 판타지가 아닌 무협을 배경으로 나왔다는 점에서 기존 엔씨소프트의 작품들과는 결이 다른 게임이었죠.

무협을 배경으로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무협게임의 틀 속에 여러가지 문화들을 믹스한 퓨전 판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협게임인 데도 권총과 총기류가 등장하는 등 무협게임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마카로니 웨스턴, 혹은 만주 웨스턴 같은 느낌도 강했죠.

정형화된 한국형 MMORPG의 문법을 깨고 액션과 스토리를 강조한 블소.
모든 면에서 가장 높은 완성도를 갖춘 작품입니다.

 

게임은 첫 공개부터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김형태 씨의 빼어난 캐릭터 원화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화려한 경공 연출은 유저들에게 비주얼 쇼크로 다가왔죠. 무엇보다 가장 혁신적인 부분은 게임의 스토리텔링입니다. 주인공이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게임을 진행하는 스토리텔링형 게임입니다. 주인공의 문파가 진서영 일당에게 당한 후 복수해 나가는 여정을 한편의 무협소설을 따라가듯 극적으로 묘사해 놓았습니다.

그동안 한국 MMORPG에서 겉돌았던 스토리를 콘텐츠 전면에 내세운 것이죠. 그냥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고수로 성장할 수 있었죠. 입체적인 캐릭터와 유쾌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블소는 한국 MMORPG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블소는 MMORPG의 스토리텔링 부분에서 독보적인 게임입니다.
특히 초반부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화중사형과 악당 진서연 같이 캐릭터가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으로 그려졌죠.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았던 블소도 단점 아닌 단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높은 난이도였죠. 사실 블소는 타이밍에 맞춰 스킬 버튼을 누르는 커맨드형 액션 게임입니다. 때문에 자유자재로 액션을 펼치려면 복잡한 키조합과 타이밍이 필요했습니다. 일반 대중이 다가서기엔 너무 어려웠었죠.

파티 플레이에서 타이밍 한번 잘못 맞춰 파티 전원이 몰살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이런 까다로운 게임성은 유저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장벽으로 통했죠. 여기에 게임운영에 대한 불만까지 겹치면서 ‘블소’는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인기는 ‘리니지’나 ‘아이온’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빅3 시대를 넘어…

‘테라’, ‘아키에이지’, ‘블레이드 앤 소울’은 지금까지 한국 MMORPG 역사의 모든 노하우를 집대성한 게임들입니다. 이전 빅3와는 달리 처참한 실패로 끝나지는 않았죠. 테라는 논타게팅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고, 아키에이지는 샌드박스형 게임과 완벽한 자유도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블소는 온라인게임 스토리텔링과 연출기법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각자 게임의 성공여부를 떠나 분명 국내 게임역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것은 분명합니다. 이 세 작품은 국내 RPG역사에서 어쩌면 마지막 빅3로 기록된 작품들이기도 하니까요 이후 같은 시기 동시에 대작들이 쏟아지는 ‘빅3 시대’는 더 이상 오지 않고 있죠.

마지막 빅3 전쟁 이후 한국 MMORPG시장은 황혼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작품수가 급격히 줄게 된 것이죠. 대부분 게임사들이 모바일게임 쪽으로 넘어갔고, PC 온라인게임 작품은 점점 줄어들었죠. 그나마 규모 있는 게임사들이 온라인 RPG에 도전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아무리 모바일RPG가 잘 빠졌다 해도, 온라인 RPG를 능가할 정도의 게임성을 보여주진 못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입니다.

 

벚꽃처럼 흩뿌려지는 온라인RPG

벚꽃은 질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말처럼 변화를 꿈꾸는 도전적인 작품들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엑스엘게임즈의 ‘문명 온라인’이 있습니다. ‘문명 온라인’은 시드마이어의 문명 시리즈를 MMORPG로 재해석한 게임입니다. 문명온라인은 시리즈의 이름값보다도 게임이 보여준 파격적인 시스템으로 호불호가 갈렸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한국 MMORPG 역사상 가장 실험적인 작품이었던 문명온라인.

 

온라인게임 최초로 시즌제를 도입해 승패가 결정되면 다시 리셋 되어 처음부터 해야 합니다. 게임의 목표도 달랐죠. 개인이 아닌 집단의 승리가 우선입니다. 게임에서 벌어들이 돈이나 아이템은 오직 공동의 승리를 위해 투자해야 하죠. 철저한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랐던 기존 MMORPG와는 달리 사회주의 시스템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은 현실과 다른 모양입니다.

유저들은 개인보다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유저들은 몇 번 게임을 해보다가 흥미를 잃었죠. 20세기 사회주의가 그렇게 허무하게 망한 것처럼 말이죠.

그나마 일부 영향력 있는 길드가 전체 게임을 주도하면서 게임을 견인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여기에 서비스 초기부터 지적되어온 고질적인 버그 문제도 발목을 잡았습니다. 결국 오픈 후 유저들이 급격히 줄어들더니 오픈 1년만에 서비스가 종료됐죠.

문명온라인보다 1년 앞서 서비스된 ‘검은사막’도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신생개발사 펄어비스가 만든 ‘검은사막’은 사실적인 그래픽과 화려한 액션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온라인RPG 황혼기를 빛낼 거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대를 모았었죠. ‘검은사막’은 화려한 비주얼과 안정된 게임성으로 큰 굴곡없이 꾸준히 인기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대가 변해서 그런지 과거 ‘리니지’, ‘와우’, ‘아이온’ 같은 센세이션한 흥행몰이는 없었습니다. 국내에서는 RPG 팬들 사이에서 그럭저럭 인기를 유지하다가, 유럽 서비스부터 대박을 쳤죠. 좋은 게임이 이렇게라도 성공하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밖에 위메이드의 ‘이카루스’, 네오위즈게임즈의 ‘블레스’ 등의 MMORPG들도 온라인RPG 황혼기를 함께한 게임들이죠.

한국 MMORPG의 명맥을 잇는 또 하나의 걸작 검은사막.
유럽시장에서 대박을 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죠.

 

PC를 넘어 모바일의 바다로…

이렇게 1996년 ‘바람의 나라’ 이후 20년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통했던 한국 PC MMORPG는 과거 패키지 RPG가 그랬던 것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PC MMORPG의 역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로스트 아크’ 같은 작품들이 RPG의 명맥을 잇고 있기 때문이죠. 비록 지금은 침체기지만 언제 어떻게 솟아오를지 모르는 화산 같은 게임이 한국 MMORPG입니다. 아쉬움과 영광이 엇갈린 20년 역사였지만 그래도 MMORPG 장르는 한국 게임역사의 뿌리이자 기둥입니다. 다음회는 한국RPG의 위대한 계보 마지막회로, 모바일시대 RPG들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덕규(게임 칼럼니스트) 게임잡지 피시파워진 취재부 기자를 시작으로 게임메카 팀장, 베타뉴스 편집장을 거쳐 현재 게임어바웃 대표 및 게임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게임을 단순한 재미로 보기보다, 게임의 문화적 가치를 살리는데 관심이 많다. 고전부터 최신 게임까지 게임의 역사를 집필하면서 게임을 통해 사회를 보는 창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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