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14 칼럼

게임하는 남자와 결혼하기

남들에겐 따뜻한 봄이지만 솔로들의 옆구리로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화이트데이입니다. 혹시, 마음에 둔 남자가 게임에 빠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공략하는 것이 좋을까요? ‘좋은연애연구소’ 김지윤 소장님이 알려주는 특급 꿀팁(!)을 소개합니다.



게임하는 그 남자

때는 바야흐로 내 나이 방년 29세.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넘은 그때 한 남자를 찍었더랬다. 그 남자는 바로 지금의 남편. 이미 그때 친구 관계였던지라, 나 혼자 흑심을 품고 찍기는 찍었으나 관계의 형질을 어떻게 변환시킬 것인지는 대 고민이었다.

다 아시겠지만 오랜 친구관계가 연인으로 변환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단 나의 작전은 온갖 핑곗거리를 찾아 둘이 만나는 기회를 최대한 많이 만드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이것 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바이러스 먹은 노트북을 소재 삼아 만남을 요청하기도 하고, 배가 고프니 알바하는 곳으로 밥을 사오라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만나면 최대한 시간을 끌며 좌로나 우로나 나의 매력을 어필하고자 애쓰고 애썼다.

미소유지_인터넷 짤

나 이뻐?

그런데 심플한 이 남자, 어찌나 깔끔한지 밥 먹고 차 마시면 밝은 얼굴로 항상 “지윤아 이제 어느 쪽으로 가니?” 라며 이른 귀가를 종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 그 남자는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너는 이제 어디로 가?”라고 되물었다. (평소에는 자존심상 바로 “일이 좀 남았어. 집에 가서 일해야지.” 혹은 “뭐 잠깐 살게 있어.” 라고 ‘나도 지금 너와 헤어질 생각이었다. 구질구질하게 너의 사랑을 구걸하지 않겠노라.’ 쿨하게 대답하곤 했다.)

그랬더니 이 남자, 집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응, 나는 잠깐 PC방 가서 게임 한 판 하고 가려고.”

실의에 빠진 강아지_인터넷 짤

그랬던 거냐…

그랬던 것이다. 나는 아쉬움을 가슴에 담고 버스에 몸을 싣고 우리의 사랑을 기원하고 또 기원하며 달렸건만. 이 남자는 아쉬움 따위가 무엇이냐, 바로 적들을 처치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아… 실망, 실망, 대실망. 나와의 이별이 그리 한 치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았단 말이더냐.

충격 때문이었을까. 나는 “나 따라가도 돼?”라며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제안을 내뱉고 말았다.

“어… 그게…너도 게임해?”

“아니, 그냥 보려구. 옆에 있으면 안 돼?”

“아… 그게… 재미없을 텐데…”

재미가 있고 없고는 내가 결정하는 법. 나는 망설이고 당황해 하는 그 남자를 따라 피씨방으로 입성했다.

2000년대 초반 피시방 풍경

이런 데서 데이트하게 될 줄은 몰랐어

피씨방에 도착해보니 이 남자는 이미 단골. 나는 옆에 앉아 서비스로 주는 요구르트를 빨대로 빨며 게임을 구경했다. 잘은 모르지만, 지켜보니 게임을 꽤나 잘했다.

“야, 너 되게 잘한다.”

칭찬에 남자는 기분 좋아라했고, 그 뒤로도 몇 번 나는 피씨방에 따라갔다. 그리고 한두 번은 게임에 동참해 칼을 허공에 휘두르며 스트레스를 받거나, 얼결에 적을 골로 보내버리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솔직히 게임이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서비스로 주는 요구르트가 맘에 들었고, 그 남자 옆에 시간을 연장해서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나중에 결혼 후 남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남편은 나중에 결혼하면 꿈이 아내와 2인용 게임을 하면서 노는 거였다고 한다. 피씨방에 적극적으로 따라와 같이 게임하는 시간을 즐기는(?) 나를 보며 ‘이 여자라면 꿈을 이룰 수 있겠다’ 꿈에 부풀었단다.

헛된 꿈을 꾸었구나_인터넷 짤

헛된 꿈을 꾸었구나

그러나 이걸 미안해서 어쩌나. ‘동상이몽’이라 했던가. 그대가 상상한 그림은 ‘게임하는 여자’였겠지만 나는 그냥 ‘너’를 원했다. 미안하다 피씨방! 너는 그저 나의 사랑에 이용당한 것뿐이었다.

남편은 결혼 후 나에게 함께 게임을 하자고 권유했으나, 나는 “사실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뒤늦게 진실을 밝혔다. 남편은 “그럼 그때 왜 피씨방에 따라온 것이냐”,  “니가 마신 요구르트의 의미는 무엇이냐”며 배신감을 주체 못했고, 나는 “그저 너와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이다” 진실을 말해주었다.

꽤 미안해서 딱 두 번 게임을 함께 해주었으나, 나의 전투기가 공중분해된 뒤로 더 이상 게임을 하지 않았다. 남편의 게임은 그렇게 고독과 배신의 상처로 점철되어갔다.

아내가 날 속였어 흑흑_인터넷 짤

아내가 날 속여쪙 크헝헝

그렇게 남편의 고독한 유희(게임)가 몇 년간의 방황으로 헛된 꿈이 되어 산산조각 나려는 찰나, 예상치 못하게 남편의 꿈을 이루어줄 새 인물이 등장했다. 새 인물은 바로 아들. 기저귀를 차고 기어 다니던 아들이 6살이 되자, 아들은 게임을 너무 하고 싶어 했고 흥미로워 했다. 남편은 아이들이 할만한 게임을 선별하여 친절하게 아들에게 게임을 가르쳐주었다.

아들에게 게임을 가르치는 남편의 살아있는 눈동자와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희열이란. 또 자기에게 게임을 가르쳐주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경외감이란.

나는 약간 소외되었으나 무언가 짐을 벗는, 제대로 된 대타를 찾은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엄마가 무참히 버린 꿈을 아들이 주워 아버지의 품에 다시 안겼다고나 할까. 아이는 주말에만 정해진 시간에 아빠와 함께 게임을 하는데, 게임을 잘 알고 게임을 설명해 주는 아빠가 상당히 멋진가 보다. 거의 전지 전능하신 아버지상을 가지게 된 느낌까지 든다.

내가 게임에 대해 무언가 말을 하면 “엄만 몰라. 그건 아빠만 알아.” 그렇게 게임은 아버지와 아들만의 어떤 성역이 되었다.

아빠와 아들 게임_게임은 둘만의 성역이 되었다

게임은 둘만의 성역이 되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내에서 아들로 바뀌기는 했지만, 남편은 어쨌든 결혼 후 둘이서 집에서 단란히 게임을 하는 꿈을 절반은 이루었다.

소파에 드러누워 게임하는 두 남자의 작은 뒤통수와 큰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노라면 3가지 상념이 든다.

  1. 남편이여! 게임 좋아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본의 아니게 속인 거 미안하오.
  2. 그리고 아들에게 친절히 게임 가르쳐 주고 함께 많이 놀아주는 당신 되게 멋지오.
  3. 마지막으로 아들아! 어미가 버린 꿈을 주워 아버지에게 새 희망을 주어 고맙다. 오늘의 이 유희가 훗날 너에게 아버지에 대한 든든하고 따뜻한 추억이 되기를 바란다.

요구르트를 서비스로 주던, 남편이 나를 아내감으로 점찍는 데 큰 획을 긋게 해주었던 그 피씨방이 아직 그대로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아… 추억이 돋는다.

P.S. 엔씨소프트의 원고 의뢰를 받아, 십 년 간 고이 접어 두었던 피씨방 연애의 추억을 오랜간만에 꺼내 보았네요. 꺼내 보아야 빛이 나는 것이 추억인데, 간만에 저의 추억이 빛을 보았습니다. 감사드리며, 모든 분들 해피 화이트데이~!


김지윤김지윤 좋은연애연구소 소장. 연애 혹은 남녀간의 소통에 대한 문제를  생생한 사례와 가슴에 푹 날아와 꽂히는 솔직한 화법을 통해 이야기한다.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으며, 저서로는 <사랑하기 좋은 날> <고백하기 좋은 날> <달콤 살벌한 연애 상담소> <직장생활도 연애처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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