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2 게임 속 스토리텔링

게임 속 스토리텔링 #6 9월 12일

게임 칼럼니스트 이경혁 작가가 들려주는 게임에 숨겨진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야기.

‘게임 속 스토리텔링’ 6편에서는 인디 게임 <9월 12일>를 소개하며,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독특한 서사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게임 속 스토리텔링 #6 9월 12일


테러리스트를 저격하라!

<9월 12일(12th September)>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게임 제목의 이 날짜는, 911 테러 다음 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목이 시사하는 바처럼 게임은 911 테러 이후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세기의 비극, 미국 911 테러 (′︿‵。)

세기의 비극, 미국 911 테러 (′︿‵。)

웹 플래시 기반의 소규모 인디 게임이지만 <9월 12일>의 장르는 무려 슈팅(!)입니다.

플레이어는 미군의 저격수 역할을 맡고, 화면에는 중동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바자르(시장)가 쿼터뷰 시점으로 펼쳐집니다.

게임의 목표는 바자르 안에서 암약하는 테러리스트를 사살하는 것입니다. 상인과 손님들 사이로이따금씩 나타나는 테러리스트들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인디 게임 <9월 12일>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인디 게임 <9월 12일>

마우스로 조준점을 움직이며 테러리스트를 쏘는 간단한 게임이지만, 이 게임은 그렇게 쉽게 이야기를 풀어가지 않습니다.

조준점에 미사일로 광역 폭격이 들어가기 때문에 민간인 오폭이 매우 쉽게 일어납니다. 민간인을 죽이면 가족과 친구들이 흐느끼기 시작하고, 분노한 그들은 테러리스트로 변하여 총을 들고 나타납니다.

결국 점점 늘어난 테러리스트로 화면이 빼곡히 뒤덮이는 것이 이 게임 엔딩 장면입니다.

푸른 옷의 테러리스트로 물드는 게임의 필연적 엔딩

푸른 옷의 테러리스트로 물드는 게임의 필연적 엔딩


이야기의 중심에 플레이어를 놓다

게임 <9월 12일>의 목표는 사실 테러리스트를 저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게임 오버’가 게임의 주제일 것입니다.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의 군사 행동이 오히려 테러리스트를 양산한다는 아이러니를, 게임은 필연적인 엔딩의 흐름을 통해 나타냅니다.

게임의 제목이 <9월 12일>인 것이 테러 이후의 군사 작전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게임임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당신은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다 #이건_게임이_아니다

당신은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다 #이건_게임이_아니다

이처럼 재미보다는 게임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두는 게임들을 우리는 시리어스 게임(Serious Game)이라고 부릅니다.

영화나 사진과 같은 매체와 달리, 게임 매체는 플레이어를 사건의 중심에 놓을 수 있습니다. 즉 플레이어로 하여금 사건을 제3자의 눈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효과를 갖습니다.

플레이 경험을 통해 더 강하게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는 #시리어스_게임

플레이 경험을 통해 더 강하게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는 #시리어스_게임

<9월 12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매체였다면 이 이야기는 어느 저격수의 이야기로 그려졌겠지요.

민간인과 테러범을 구별할 수 없는 현장, 긴박하게 저격수의 시선을 좇는 카메라, 방아쇠를 당김에 있어 고뇌하는 병사의 손가락과 흔들리는 동공을, 영화라면 그렇게 그려낼 것입니다.

하지만 게임은 메시지의 그림이 맺히는 지점을, 화면이 아닌 플레이어의 마음 속에 설정합니다.

공격 명령을 플레이어에게 일임함으로써 사건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씌우기 때문에, 게임 속 이야기는 오롯이 플레이어 자신의 이야기이자 경험이 되어버립니다.


시리어스 게임의 스토리텔링

그래서 시리어스 게임의 스토리텔링은 타 매체들과 다른 형태,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9월 12일>은 언뜻 스토리텔링이 없는 듯 보이지만, 서사는 게임 안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심상 안에 그려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느덧 테러리스트로 변해버린 플레이어, 그리고 나

어느덧 테러리스트로 변해버린 플레이어, 그리고 나

서사가 플레이어 안에서 주체적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게임은 핵심 메시지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정된 엔딩을 설계합니다.

어떤 식으로 플레이하든 플레이어는 민간인 오폭으로 인한 엔딩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스토리텔링이지만, 그 결과만큼은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설계입니다.

테러리즘도, 전쟁도, 보복도 STOP!

테러리즘도, 전쟁도, 보복도 STOP!

‘당신의 오폭으로 테러는 더욱 커질 것이다’라는 주제를 놓지 않으면서도, <9월 12일>의 이야기는 고정되지 않고 개별 플레이어들의 마음 안에 자생하게 됩니다.

이미 설계된 목표에 맞게 흘러가도록 게임의 환경만을 조정하는 방식은, 게임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서사로 공감을 전달합니다.

게임에서 승리하는 법은 단 하나, 게임을 그만두는 것

게임에서 승리하는 법은 단 하나, 게임을 그만두는 것

카메라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관조’하던 영화, TV의 시대를 넘어, 게임은 이제 이야기의 중심에서 세계를 ‘체험’하는 형태로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뉴미디어로서의 게임 시대, 우리는 이 새로운 방식의 이야기에 적응하고 변화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개별 플레이어들도 각기 다양한 입장과 시각을 갖고, 더욱 많은 생각과 비판을 할 것입니다.

이야기를 완성하는 역할이 게이머, 즉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경혁

이경혁

게임 제작 관련업에 종사한 경험이 없는
순수 게이머 출신의 게임 칼럼니스트.
게임 비평을 통해 우리 사회 전반에
게임의 매체성을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저서로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이 있으며
성균관대에서 ‘게임과 인문학’ 교양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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