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15 내 인생의 게임

내 인생의 게임 #3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게임회사 사람들이 꼽는 ‘내 인생의 게임’은 무엇일까요? ( ͡° ͜ʖ ͡°)

페르시아의 왕자와 데스트랙에 이어, 이번엔  색다른 유머 코드로 인기를 끌었던 국산 RPG게임을 소개할까 합니다.

IR팀 김철웅 대리의 인생 게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Astonishia Story)’를 만나 보실까요~?


때는 1994년 가을. 컴퓨터 학원이 우후죽순 생겨나 PC방의 역할도 겸하던 시절이었다. 학원의 주요 커리큘럼은 베이직을 배우거나 워드프로세서 3급 혹은 2급을 준비하는 것이었는데, PC에 각종 게임들이 푸짐하게 설치돼 있어 수업 시간 전후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고인돌(Prehistoric)’이나 ‘페르시아의 왕자’ 등은 기본이고, ‘피와키티’나 ‘무장쟁패’같은 유료(?) 패키지 게임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04이 화면이 친숙하다면 당신도 아재? ( ͡° ͜ʖ ͡°)

하지만 어린이날 슈퍼컴보이를 득템해 이미 횡스크롤 게임의 최강자인  ‘슈퍼마리오월드’를 경험해 본 나로서는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PC용 횡스크롤 액션 게임엔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다.

슈퍼 마리오 월드__SMWPic

2D마리오의 명작 ‘슈퍼마리오월드’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옆집에 놀러갔다가 생전 처음 보는 게임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손노리’라는 국내 회사에서 만든 RPG 게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였다.


내 인생 최초의 RPG

첫경험이라서 그런 것 일까? ‘로이드’라는 주인공이 여관 2층에서 일어나 보라색 바탕의 대사창에서 노란색 글씨로 중얼대던 첫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잠에서 막 깨어난 로이드를 베이지색 세진103키보드로 이리 저리 움직이며 그렇게 나는 내 인생 최초의 RPG를 만났다.

캡처주인공이 늦잠에서 깨어나며 모험이 시작된다…!

대다수의 RPG게임 주인공들처럼 ‘로이드’ 역시 게임 전개 초반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중요한 지팡이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로이드’는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프란시스’라는 강한 적을 만나 지팡이를 빼앗기고, 모든 동료를 잃은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이후 로이드는 빼앗긴 지팡이를 되찾기 위해 ‘프란시스’를 추격한다. 그 여정에서 각자의 개성이 분명한  ‘핫타이크’, ’렌달프’, ‘러덕’, ‘일레인’, ‘아크라’ 등의 캐릭터를 만나게 되고, 최종 보스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과정은 이들과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로 채워진다.

b0070187_4f71c6d0353fb종종 중2병스러운 철학적 멘트를 던지는 로이드

사실 스토리 전개 방식이나 기본적인 구성은 전형적인 RPG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정 초반의 시련을 딛고 점점 성장하는 주인공이 동료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 궁극적으로 최종보스를 물리친다는 (물론 히로인과의 로맨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 구성을 따르고 있다.

b0070187_4f6b2d6160a1c로이드와 썸 타는 ‘츤데레’ 히로인 일레느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태어나서 처음 접한 RPG였기에, 기존 RPG와의 유사성 같은 건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한편의 소설을 읽듯 게임에 천천히 몰입했을 뿐. 이후  ‘삼국지영걸전’, ‘아마란스전설4’, ‘영웅전설3,4’ , ‘창세기전2’ 등 명작 RPG를 차근차근 섭렵해 나갔다.


해학과 달관의 캐릭터, 패스맨

여러 명작 RPG들을 거쳤음에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첫 손에 꼽는 이유는 이 게임을 통해 개발자들에 대한 강한 존경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비롯해 손노리가 개발한 게임에는  ‘패스맨’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패스맨’은 그 이름이 말해 주듯 불법 복제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 ‘패스워드’를 묻기 위해 게임 내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캐릭터다.

1386254525_XAbGru1U_SSI_20131111172013_V뜨끔  (´д`、)

마치 음주음전 불시단속처럼  플레이 도중 뜬금없이 나타나 패스워드를 묻는데, 재미있는 건 패스워드를 올바르게 입력해도 ‘왠지 속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는 식의 대사를 중얼거리며 사라진다는 것이다.

p-man1

알면서도 속아주는 패스맨 마음

나는 패스워드표를 흑백으로 복사한 다음, 오리지날 컬러본과 대조해 각각의 패스워드 색을 손으로 일일히 써넣는 방법으로 단속(?)을 피했었다. 대다수의 초딩들이 이런 식으로  ‘패스워드 단속’ 을 피했을 것이다.

따란…그런데 손노리는 이 모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패스맨’을 통해 모든 것을 달관하고 초연한 듯한 의연함을 보여준 것이다!

chu10011906포기가 빠른 패스맨 형님  

당시 나는 손노리의 이러한 유머 센스와 대인배스러운 풍모에 존경심을 넘어 강한 동경마저 느끼고 있었다. 간혹 해외토픽에 나오는, 폭설로 뒤덮인 마을에서 신 나게 스노보드를 타는  ‘양키 형님’들의 유쾌한 모습같다고 해야 하나?

DD86D77F76A14214B56504095D8DE111폭설 따위 대수겠는가! 쿨내 진동하는 양키 형님들의 ‘청바지 세우기’ 놀이

손노리는 나에게 있어 이런 정신적 여유와 낙천적인 마인드를 지닌,  ‘양키형님’들 같은 개발사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치 세상을 달관하듯 ‘허허허’ 웃음 짓는 그런 멋진 형님 말이다.

코드가 딱 맞는 친구를 만났을 때처럼, 난 생면부지의 손노리 개발자들과 ‘패스맨’을 통해 그런 감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마치 I.Passman.U 처럼 말이다.

FF윈도우용으로 업그레이드되며 2:8 가르마를 버린 패스맨 

돌이켜 보면 개발 단계부터 당연히 불법 복제될 것을 알고 그것을 해학적인 유머 코드로 게임 안에 녹여낸 개발사는 손노리가 유일하지 않을까. 척박한 게임 개발 환경에서도 손노리는 마치 ‘한번 신 나게 놀아보자’라 외치며 게임 개발 자체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리라.


감동을 더하는 음악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지가 기억에 남으려면 흔히들 음식이 맛있어야 한다고 한다. 게임에서는 음악이 여행지의 음식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음악은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게임의 감동을 기억할 수 있는 가장 큰 매개이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오프닝 영상

듣는 이로 하여금 진정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 것은 연주와 녹음의 질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멜로디의 힘이다. 그런 관점에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국내 게임사적으로 봐도 손에 꼽힐 정도의 청각적 쾌거를 이룩해냈다고 생각한다.

중국 여행 중 먹은 정말 제대로 만든 동파육 한 점이 중국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처럼,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음악은 마치 여행지를 회상하게끔 만드는 음식처럼  20여년 전의 감동을 소환시키는 매개로 남아있다.


다크사이드 스토리, 그리고…

앞서 언급했지만 나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불법 복제를 통해 즐겼다. 내 인생의 게임으로 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계기로 손노리의 열혈한 팬이 되었으며, 그 결과 이듬해 출시된 손노리의 차기작  ‘다크사이드 스토리’를 부모님을 졸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다.

다크사이드스토리

손노리의 차기작 다크사이드 스토리 

‘다크사이드 스토리’ 역시 내게는 인생 최초의 유료 구매 패키지 게임으로서 의미가 있다. 돌이켜보면 한 유저가 어떤 게임사의 콘텐츠에 감동을 받아 미안함과 기대감이 동시에 작용하여 자발적인 차기작 구매로 연결된 아주 바람직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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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사인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며 게임 시작

하지만 돈 주고 구입한 ‘다크사이드 스토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컴퓨터학원에 깔려 있는 걸 봤을 때의 후회와 억울함을 생각한다면(요즘 표현으로 동심파괴라고 한다), 당시 국내 PC게임 패키지 시장에 불법 복제가 얼마나 만연해 있었으며 개발 환경은 또 얼마나 열악했는 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마무리하자면, 한 시대를 풍미했고 국내 패키지 게임 개발의 혁신을 주도했던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지금의 초등학생들이 나중에 커서 인생의 게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때 나처럼 국내 게임 개발사가 만든 국산 게임을 자신있게 댈 수 있을까?

다크사이드 스토리 코멘터리

나보다 연배가 높고 일본게임을 먼저 접했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운좋게도 국산 RPG의 포문을 열었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통해 RPG 첫경험을 할 수 있었고, 이 훌륭한 게임이 내 인생의 게임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기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척박한 개발환경에서 이렇게 astonishing한 ‘국산’게임을 즐길 수 있는 행운을 선사해준 손노리 형님 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싶다. 그리고 지금의 초등학생들도 나같은 행운을 누리기를 바란다. 언젠가 그들도 나처럼 이런 글을 남길 기회가 왔을 때, 그 주인공이 ‘국산’게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철웅

김철웅

엔씨소프트 IR팀에서 에이징 중…
Vintage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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