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1 Creator Crew

모험을 쫓는 상상, 상상을 좇는 그림, 양경일

Creator Crew:
엔씨의 콘텐츠와 자신의 크리에이티브를 연결해 즐거움을 확장하는 사람들

블레이드 & 소울 2(이하 블소2)에는 게임 속 이야기를 일러스트, 영상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사가’ 시스템이 있습니다. 사가의 일러스트 작업에는 소마신화전기부터 시작해 신암행어사, 신의 나라 등을 창작한 양경일 작가가 참여했습니다. 한국 무협 장르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그의 손에서 연마되는 서사의 파편들은 순식간에 새로운 하나의 공간과 캐릭터로 재구축됩니다. 블소2의 사가 ‘유기’ 편의 일러스트를 맡아 새롭게 해석한 거장, 양경일 작가의 작업 세계로 들어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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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상상을 실체화하다, 한국 무협 작화의 대가와 블소2의 만남

블소2 사가의 일러스트 작업에 참여한 소감을 듣고 싶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어떻게 작업하고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무척 궁금했다. 게임 속 설정으로 존재하는 캐릭터를 재해석해서 구체화하면 독자들 혹은 유저들이 어떤 부분들을 주목할지에 관해서도 고민했다. 시나리오와 대사, 설정 등을 이해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알아가면서 ‘유기’라는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해 작품을 소화하고자 했고, 또한 내 나름의 세계관으로 해석해 이미지화했다. 다행히 블소2 쪽에서도 이 해석을 좋게 봐주셔서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다.

웹툰 작업과 차이가 있었을 것 같은데.
우선 시나리오를 받아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기존에 하던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웹툰은 여러 컷이 나열되기 때문에 모든 컷을 크고 정교하게 그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려도 컴퓨터 모니터나 모바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그리고 싶어도 넣을 수 없어서 아쉬울 때가 있었다.

이번 작업은 한 컷 안에 내용을 모두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큰 판에 정교하게 그렸다. 예전에 단행본을 펴낼 때 이런 방식으로 많이 작업했는데, 웹툰으로 넘어오면서는 거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큰 그림 그려서 굉장히 재밌다’고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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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의 캐릭터를 구상할 때 중점을 둔 점이 있다면.
처음 설정 문서를 받았을 때는 막연하게 유기라는 남자 캐릭터가 미형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토리를 더 받아보니, 표정에 감정을 많이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또한 미형의 느낌보다는 남성다운 모습으로 바꾸는 게 낫겠다 싶었다. 설정에서는 유기의 체형이 무척 길었는데 여기에 근육을 더해 더욱 단단한 느낌으로 표현했다.

분량이 적은 자료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여러 과정을 거쳤을 것 같다.
이런 작업을 할 때는 우선 시나리오, 설정 등의 문서를 여러 번 읽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고서 머릿속에 상상으로 3D 공간을 하나 만든다. 그다음에 인물을 배치하고 직접 대사를 읽으면서 연기해본다. 그러면 ‘아, 얘는 이래서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아, 이런 감정이겠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시나리오를 받고 이미지를 구축하기 전에 항상 이런 프로세스를 거치는데, 이 작업이 무척 재미있다. 맞든 틀리든 우선 내 머릿속에서 나만의 상상 속 세상을 만들 수 있으니까. 이 과정이 수월하면 이후 바로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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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무협 만화를 그려왔고 이번 작업에도 그런 느낌을 잘 반영한 것 같다. 영향을 받은 콘텐츠가 있는지.
어릴 때부터 마징가 제트, 울트라맨 등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대부분 좋아했다. 당시 충격적이었던 작품은 이정문 선생님의 『캉타우』, 그리고 김형배 선생님의 『20세기 기사단』이었다.

영화로는 친구들과 우연히 본 <촉산>이 있었다. <촉산>을 보고 나서 무협에 푹 빠졌다. 그 덕분에 예컨대 인물이 달릴 때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이 흩날리는 모습 등이 그림체에 스며들게 된 것 같다.

당시에는 야구 만화도 인기였는데 나는 스포츠물은 좋아하지 않아서 잘 안 봤다. 내 외모도 스포츠와는 어울리지 않지 않나.(웃음) 스포츠물은 공간 자체가 현대인데, 나는 <촉산>처럼 새로운 공간을 상상하는 게 좋아서 무협 쪽에 집중했다.


온전히 이해가 될 때 비로소 그림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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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업을 할 때 무척 꼼꼼하게 체크하고 질문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작품 안의 장소, 인물의 표정 등은 설정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두 인물이 마주쳤을 때 그 장면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상황인지가 명확하지 않으면 인물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애매해진다. 블소2 게임은 3D인 데다 인물들이 많은 것을 입고, 또 많은 것을 달고 활동한다. 사실 그런 옷을 입고 편하게 밥을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구상할 때 그런 부분들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그림으로 구체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떤 건 빼고 어떤 건 꼭 넣어야 할지 등을 정한다. 그렇기에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살피고 민감하게 생각하며 이해가 될 때까지 질문한다. 이해되지 않으면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제대로 그릴 수가 없다. 반대로, 이해가 되는 장면은 30분 만에도 뚝딱 구상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활동하셨다. 그때는 스토리작가와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없었는지.
평소 같이 작업하는 스토리작가가 쓴 글은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국적이 별 상관이 없다.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무슨 생각으로 글을 썼는지 그 이유가 통하는 부분이 있으니 내 나름대로 해석해도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그래도 궁금한 부분은 살짝살짝 물어본다.(웃음)

작업 방식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것 같다.
예전에 잉크를 쓸 때는 먹을 직접 갈았다. 그와 비교하면 디지털은 일단 너무 편하다. 게다가 컬러 작업도 바로 할 수 있다. 디지털로 넘어오니 모든 기능이 너무 편했기 때문에 사실 별다른 반감이 없었다. 물론 가끔 손으로 하던 작업이 그리울 때도 있다. 하지만 다시 그렇게 원고를 그리라고 하면 이젠 못 할 것 같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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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해 평소에 참고하시는 게 있는지 궁금하다.
평소에 영상을 자주 본다. 유튜브 동영상, 넷플릭스 드라마 등 가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와닿는 부분이 있으면 기억에 많이 남더라. 그러면 나중에 필요할 때 그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번에도 콘셉트 미팅할 때 BTS의 ‘FAKE LOVE’ 뮤직비디오를 예로 든 적이 있다. 희고 큰 손이 있는 조각 앞에서 BTS가 춤을 추는데 그 음영과 손의 대비가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 느낌이 어울릴 것 같더라. 이번에 작업한 것 중에는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고 만든 것도 있다. 두 인물이 걸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산 위를 걸어가는 모습이 생각나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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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나 열매 등의 세세한 디테일에도 신경 쓴 것 같다.
내가 동물을 좋아한다. 현재 웰시코기 두 마리를 키우고 있고, 작업실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도 저마다 기르는 동물을 데려와서 여러 동물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동물의 표정을 보면 사람과 비슷하다. 그래서 평소에 동물을 그릴 때 그런 풍부한 표정과 따뜻한 느낌을 잘 살리려고 한다. 블소2 작업을 할 때도 게임 세계관 자체는 차갑고 어둡기 때문에 사가 속에 나오는 이야기는 좀 더 밝고 따뜻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새가 지저귀거나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을 보면 평화롭다고 느낀다. 그래서 삽화에 새와 나무 등의 오브젝트를 많이 활용했다.


앞으로의 목표는 없다,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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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마감할 때.(웃음) 그런 날은 흐리면 흐린 대로 좋고, 맑으면 맑은 대로 좋다. 마감을 하면 이런저런 영상을 보고, 강아지와 놀기도 한다. 물론 일이 있고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도 즐겁다.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는지.
슬럼프가 와도 사실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려야 한다. 독자와의 약속이기 때문에 어길 수가 없다.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이 질문을 듣고 한참을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사실 목표가 없더라.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이 먹어도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다. 그렇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죽지 않는가. 현재 작업실에서 같이 활동하는 친구들 중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작업실을 잘 정리하기로 약속했다. 그때까지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 곧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뿐이다.

몇 가지 더 이야기해보면, 기회가 되면 그동안 해보지 않은 새로운 장르에도 도전하고 싶다. 또한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 경험을 후배들이 잘 쓸 수 있도록 알려주고 싶다. 우리나라의 웹툰 콘텐츠가 흥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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