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9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1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수많은 대중문화 콘텐츠. 그 안에서 우리는 때때로 ‘게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게임을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삼거나 게임의 속성을 차용한 콘텐츠를 쉽게 만날 수 있는데요.

영화와 만화, 드라마와 장르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 속에서 게임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알아보며 게임과 대중문화의 접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강상준 님이 들려주는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그 첫 번째 편에서는 게임과 같은 인터랙티브 형식을 반영한 드라마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를 다뤄보겠습니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1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흔히들 인생을 가리켜 선택의 연속이라 말한다. 얼핏 순간의 선택 하나하나가 인생을 좌우한다는 거창한 의미 같지만, 실은 잘못된 선택과 그에 대한 후회를 의미하는 잠언이라 봐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선택의 기로로 기억되는 순간은 대개 후회로 말미암아 각인된 경우가 많다. 반대로 좋은 선택이었다며 스스로도 대견한 기억이 언뜻 스치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는 적극적으로 방관한 결과론인 것도 같고 말이다. 이는 중대한 선택의 순간이 늘 시험처럼 명확한 선택지로 제시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A냐, B냐, 왼쪽 길이냐, 오른쪽 길이냐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불명확했고, 결과 역시 정확히 재단하기 힘들거나 보통은 유보되기 일쑤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의 주체가 늘 나 자신이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지 여부다. 과연 정말로 나 스스로 결정한 것인지, 그 선택이 온전히 나 자신만의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되묻는다면 어째 조금은 불안해지기까지 한다. 주변의 조언 혹은 압력, 환경, 심지어 기분이나 운 등에 휘둘렸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의지’는 특히 SF 장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 중 하나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뻔한 이야기조차 자유의지와 연관 지으면 그 즉시 중층의 의미를 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는 이러한 인간사 선택의 문제를 문자 그대로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2011년 12월부터 방영된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는 옴니버스 형태로 구성된 일종의 SF 버전 <환상특급>이자 근미래판 <기묘한 이야기>다. 현재까지 다섯 개의 시즌이 방영되었으며, 이 중 독립된 TV영화 형식으로 공개된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는 시청자의 선택에 의해 이야기의 진행과 결말이 바뀌는 인터랙티브 영화로서 선택이라는 주제와 소재를 아예 영화의 형식과 ‘동기화’했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1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1984년 6월, 프로그래머 스테판 버틀러(핀 화이트헤드 분)는 제롬 F. 데이비스가 쓴 『밴더스내치』라는 판타지 소설을 게임으로 만들고자 한다. 스테판은 게임회사 터커소프트를 찾아가 사장인 모함 터커와 수석 제작자 콜린 리트먼으로부터 게임 제작을 허락받고 크리스마스 발매를 목표로 홀로 프로그래밍에 돌입한다.

스테판이 게임화하고자 하는 소설 『밴더스내치』는 일종의 게임북으로, 1페이지부터 차례로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다 일정 이벤트와 맞닥뜨리면 몇 가지 지시 중 하나를 골라 자신이 선택한 페이지로 향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당연히 선택에 따라 내용이 바뀔 뿐 아니라 캐릭터의 생사나 이야기의 결말 역시도 여러 갈래로 나뉜다. 갖가지 선택지를 조합한다면 경우의 수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해지는 것. 스테판이 구상한 게임 역시 이런 수백 가지 이야기를 한데 담아내는 것이니 결코 녹록할 리 없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1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시청자에게 처음 주어진 선택은 상당히 제한적이어서 스테판이 아침식사로 먹을 두 가지 시리얼 중 하나를 고르거나 음악 테이프를 선택하는 정도다. 선택에 따라 스테판은 우리가 정해준 시리얼을 먹고 BGM 역시 시청자의 선택에 의해 바뀐다.

물론 이는 게임으로 치면 일종의 ‘튜토리얼’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스테판에게 큰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이 극 중 캐릭터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키기에는 충분하다. 이윽고 터커소프트에 기획안을 들고 찾아가 가완성된 게임을 시연한 스테판은 터커 사장과 리트먼으로부터 터커소프트에 입사하는 것을 요청받는다. 그리고 화면에는 다시 선택지가 뜬다. 입사를 수락하느냐, 거절하느냐. 바로 영화의 첫 번째 중요 분기점이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1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는 입사를 수락할 것이다. 어쨌든 게임을 제작해야 이야기는 시작될 것이고, 캐릭터들의 호의적인 분위기 또한 스테판의 입사를 한껏 북돋으니까. 무엇보다 도저히 수락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힘들다.

그러나 이런 관객의 기대는 곧 철저히 무너진다. 입사를 수락하면 곧바로 이야기는 엔딩을 향하니 말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시점은 게임 출시일인 크리스마스로 쏜살같이 흘러간다. 그리고 게임을 리뷰하는 TV프로그램에서 게임 <밴더스내치>는 여러 사람들이 날림으로 만든 탓에 ‘별점 0개’라는 불명예를 안고 실패한 것으로 마무리된다. 말 그대로 ‘게임오버’인 셈이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1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재미있는 부분은 이제부터다. 실패한 엔딩을 뒤로하고 처음으로 되돌리면 빠르게 건너뛰어 이야기는 다시금 스테판이 터커소프트를 찾아가는 시점부터 전개된다. 마치 스테판이 제작 중인 게임인양 ‘저장(Save)’된 시점으로 ‘되돌리기(Load)’를 한 듯한 모양새다.

물론 극 중 스테판은 이 날 처음으로 터커소프트를 방문했을 터. 그러나 스테판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마치 이 일을 두 번째 겪는다는 듯 리트먼이 만들고 있던 게임은 물론 버그의 원인까지 알고 있다. 또 이전 면접 때는 원작 소설인 『밴더스내치』를 읽지 않았던 리트먼이 이번에는 책을 읽은 것으로 나온다. 작은 변화지만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아니, 굉장히 수상하다. 스테판조차 이런 미묘한 변화를 ‘데자뷔’로 인식하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영화 곳곳에 스며드는 것은 당연하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1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결국 터커소프트의 입사를 거절하고 제작비만 지원받아 홀로 <밴더스내치>를 제작하기로 한 스테판은 이후에도 여러 선택지와 마주한다. 예컨대 게임이 잘 안 풀리고 같이 사는 아빠마저 자신을 닦달할 때면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인지 컴퓨터에 차를 쏟거나 아빠에게 소리를 지르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물론 컴퓨터에 차를 쏟으면 다시금 엔딩이다. 게임을 완성할 수 없을 테니까. 이후에도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가던 중 길에서 우연히 본 리트먼을 쫓아가는 의외의 선택지를 선택한다면 이야기는 한층 더 확장되고 환상과 현실은 더더욱 복잡하게 뒤섞이는 식이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1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선택이라는 게 실은 전혀 의미 없다는 식의 몇몇 결론도 흥미롭다. 리트먼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스테판을 돕는답시고 그에게 환각제로 추정되는 약을 건넨다. 이때 시청자는 스테판으로 하여금 이 약을 복용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한다. 약을 복용한다면 지금 그가 맞닥뜨린 현실이 하나가 아니라는 다중 차원을 설명하는 기묘한 환각 장면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약을 먹지 않더라도 결국엔 조금 돌아 같은 결론을 향한다. 리트먼이 몰래 스테판의 찻잔에 약을 타니까. 선택의 여지만 주어졌을 뿐 결과는 동일한 것. 그럼에도 모든 결과를 우리가 선택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점 의심이 들 만하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1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이후에도 화면에 선택지가 제시될 때마다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전개된다. 작품 초반, 입사를 수락하자마자 시시한 엔딩과 마주했던 것처럼 곧바로 또 다른 엔딩(즉, 게임오버)과 마주하는 일도 다반사다. 물론 게임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선택을 되돌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럴 때마다 스테판은 이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인지하게 된다. 심지어 이 모든 선택 역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마저도. 그리고 마침내 게임 <밴더스내치>를 설계 중인 스테판은 결국 자기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음을 점차 인지하게 된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1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물론 스테판을 조종하는 주체 또한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스테판의 신경증이 마치 영화 <인셉션>처럼 어릴 적 트라우마를 강제로 주입당한 탓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지금 자신이 마주하는 일들이 21세기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인 ‘넷플릭스’의 소행이라는 메타극의 형태를 향하기도 한다.

여기에 대응하는 스테판의 결말 역시 다채롭다. 누군가를 살해하고 심지어 선택에 따라서는 시체를 토막 내기까지 하는 파국 중의 파국으로 치닫는가 하면, 자유의지를 배제당한 ‘배우’로서의 삶에 완강히 저항하기도 한다. 때때로 스테판은 귓불을 만지느냐, 손톱을 깨무느냐 같은 소소한 갈림길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지시’하더라도 이를 꾹 참아낸다. 이것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누군가, 즉 우리, 시청자의 의지라는 것을 알아챘고 결코 미지의 존재 따위에 좌우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1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결국 게임을 제작하던 스테판은 자신이 만든 게임처럼 복수의 인생을 통해 여러 분기점 사이를 헤맨다. 더불어 시청자는 그와 함께 여러 엔딩과 마주하며 다중 차원과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게임 그 자체의 형식에 한껏 매몰된다. 스테판이 혼신을 다해 제작 중인 게임 <밴더스내치> 역시 우리의 선택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진다. 이 중 리뷰 프로그램으로부터 별 다섯 개 만점을 얻는 게임에 대한 스테판의 변은 이렇다. 게이머에게 자유도가 높다는 착각만 줄 뿐 모든 걸 프로그래머인 자신이 결정한다는 교훈을 게임에 반영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자유의지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하찮은 자유도로 구성된 인생이라는 게임이, 시청자의 능동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진 영화의 형식으로 인해 훨씬 더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후회로 점철된 선택의 순간, 자유의지를 상실한 선택을 영화의 주제이자 형식으로 한데 꿴 작품의 층위는 곱씹어볼수록 상당해진다. 무엇보다 어느 순간 인생이라는 게임의 난이도가 왜 ‘극악’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게임은 반복할 수 있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으니까. 게다가,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글쎄, 정녕 확신할 수 있을까? 정말로?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DVD2.0》《FILM2.0》《iMBC》《BRUT》 등의
매체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영화, 만화, 장르소설, 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 살았다.
『위대한 망가』『빨간 맛 B컬처』 시리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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