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7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게임 제작의 낭만과 현실에 대하여, 엔딩 보게 해주세요

영화와 만화, 드라마와 장르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 속에서 게임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알아보며 게임과 대중문화의 접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강상준 님이 들려주는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에서는 게임 개발자들의 현실과 이상을 다룬 단편소설집 <엔딩 보게 해주세요>를 살펴보겠습니다.


가끔 그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좋겠다고. 싫지야 않다. 설마 싫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일은 일이다. 쉽게 말해 취미가 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덕분에 보기 싫은 영화도 봐야 하고 읽기 싫은 책도 읽어야 한다. 가끔은 그런 강압이 모르고 있던 미식을 맛보는 기회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로 말미암아 새삼 즐겁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일은 일이라는 것이다.

아마 게임을 좋아해 게임 만드는 직업을 선택한 이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체로 즐겁다고 말할 정도는 될 터. 하지만 타인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감수해야 하는 순간, 너무나 괴롭고 피곤해 다 놓고 떠나고 싶은 순간, 내 능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나 낙담했던 순간, 반대로 내 능력을 따라주지 못하는 주변 환경에 절망해야 했던 순간, 결과물이 생각대로 나오지 않았거나 생각보다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아 허탈했던 순간을 감내해야 할 때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게임계에 몸담았거나 몸담고 있는 작가 다섯 명의 단편을 묶어낸 <엔딩 보게 해주세요>는 그런 애환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엮어낸 앤솔러지다. 모두 애환(哀歡)이라는 말 그대로 슬픔과 기쁨이 묘하게 뒤섞인 가운데 게임을 향한 지대한 애정과 그리움 또한 슬며시 고개를 드는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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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DA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김보영 작가의 <저예산 프로젝트>다. 이야기는 게임 개발자 이세연을 동경했던 화자가, 정식으로 출시되지 못했던 이세연의 증강현실 게임을 플레이하며 그와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시작된다. 화자가 처음 이세연의 게임을 접하게 된 것은 열 살 때 일로 어느 대통령에 의해 ‘유소년 전면 게임 금지령’이 내려진 다음 검열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디 게임을 즐기면서부터였다. 그가 느끼기에 이세연의 게임은 다른 게임과는 사뭇 달랐다. 이세연의 게임에는 그만의 확고하고도 독특한 철학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이세연을 찾아가 그와 함께 일하게 된 주인공은 이를 확실히,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로서 이세연은 다른 이와는 더더욱 달랐으니까.

그의 철학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게임은 게이머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감각을 반드시 전달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유저가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은 5분을 넘지 않게 할 것. 단순하게라도 주기적으로 조작과 선택을 하게 할 것. 선택지를 줄 때에는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이도록 할 것. (…) 몇 가지 선택은 운명을 크게 바꾸어야 하고, 엔딩은 충분히 많아야 하며 가장 만족스러운 엔딩을 얻기 위한 경로는 가장 어려워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하나의 엔딩은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수백 시간의 플레이에 대한 보답은 비극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과 같은 부수적인 법칙이 그의 ‘게임철학’을 뒷받침한다.

현재 주인공은 이세연의 유품으로 전달받은 게임을 인터넷에 프리웨어로 풀어버린 후 뒤늦게 그의 증강현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중이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과거 이세연과 함께 게임을 제작했던 추억이 여기 직조된다. 물론 추억이 마냥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이세연의 게임에 매료됐던 팬이지만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으니까. 적은 제작비로 말미암아 그래픽은 대충 만들지언정 작은 퀘스트 하나에도 정교한 시나리오가 가미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제작자 이세연 특유의 프로세스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게임은 현실에선 전혀 돈이 되지 못했던 까닭이다. 9년이나 그와 일하고서도 돌이켜 생각해 얻은 결론 역시 후회와 서글픈 인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단지 저임금으로 자신의 청춘을 ‘착취’한 악덕 사장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와 더 일찍 끝내지 못한 게 한이라는 것.

하지만 이야기는 엔딩에 이르러 이 해묵은 감정을 단숨에 일소한다. 결국 게이머에게 예상치 못한 이벤트와 결말을 안겨주려 했던 이세연의 남다른 철학이 게임에 대해 품게 된 복잡한 애증을 무한한 애정으로 수렴하고야 마는 것이다. “예측할 수는 있지만 예측을 살짝 벗어나는 이벤트로 놀라게 할 것”이라는 이세연의 법칙 그대로 ‘에필로그’라는 이름으로 예상치 못한 순간 나타난 이벤트는 그가 주인공에게 남기고자 했던 진짜 유산처럼 보일 법하다. “이벤트를 볼 확률은 높게, 하지만 놓쳤을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여 그 일이 특별한 일처럼 느껴지게 할 것. 그래서 믿게 할 것. 당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영웅적인 선택도 바보 같은 선택도 할 수 있는, 누구보다도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실패와 좌절로 기억되던 이세연과의 추억이 반짝반짝 빛나던 청춘의 한 자락으로 변모하는 이 ‘엔딩’은 잔잔한 여운과 함께 게임을 만드는 이들의 고된 노동, 그 시절 노력했으나 좌절했던 아픈 기억을 그렇게 한껏 위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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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전삼혜 작가의 <당신이 나의 히어로>, 김철곤 작가의 <즉위식>, 김인정 작가의 <앱솔루트 퀘스트>, 김성일 작가의 <성전사 마리드의 슬픔>은 모두 게임 제작자의 입장에서 맞닥뜨릴 만한 에피소드를 유쾌하게 그려낸다. 이 중 <당신이 나의 히어로>와 <즉위식>은 이미 종료된 게임의 리메이크 작업을 통해 ‘과거’라는 흘러간 시간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물론 두 작품의 톤은 확연히 다르다. 특히 <앱솔루트 퀘스트>는 게임회사의 일상을 시트콤 같은 필치로, 곧은길을 부러 돌아가기 일쑤인 제작 과정과 여러 조직이 뒤엉킨 가운데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냈다. 또한 <성전사 마리드의 슬픔>이 다루는 게임은 TRPG로, 마스터가 중심이 되어 플레이어와 함께 게임을 ‘만들어가는’ 동시에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게임 캐릭터들의 사정을 한데 뒤섞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당신이 나의 히어로>는 5년 전 종료한 게임인 <마지막 왕>의 리메이크 게임을 제작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향수’에 방점이 찍혀 있다. 전신 감각으로 게임을 즐기는 시대, ‘하프감각 시스템’, 즉 고글과 부츠, 장갑만으로 플레이했던 게임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이들의 과제다. 게다가 하프감각을 다시금 하프감각 시스템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니 뭔가 이상하지만 “그때 하프와 지금 하프는 다르”다는 게 중론. 즉, 촉각 시스템이 발달하기 전이라 활이나 칼을 쥐는 맛이 똑같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도합 90종의 감촉을 만들어야 한다니 만만치 않은 작업량이 주어진 셈이다.

그러나 가장 난감한 것은 과거 비인기 캐릭터 진영을 보완하는 일이다. <마지막 왕>은 미스트리스, 라비아, 쿼터베리온 세 진영이 각각 자신이 선택한 군주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경쟁했던 게임인데, 개중 비교적 ‘손맛’이 덜한 마법사 캐릭터 미스트리스에 대한 자료는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제작은 잠시 난황에 빠지지만, 홀로 미스트리스 연맹의 자료를 방대하게 구축했던 ‘젤소미나’라는 업로드 계정을 발견하면서 리메이크 작업은 급진전한다. 자연히 제작진 또한 비인기 캐릭터에 대한 그의 애정에 찬사를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마지막 왕>이 그에게 새로운 즐거움이 되길 바란다. 더욱이 이번에는 미스트리스 진영이 비인기 진영으로 저무는 것이 아니라 미스트리스가 왕으로 등극하는 세계가 도래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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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식>은 10년 전 <영원한 전설>이란 게임으로 대히트쳤지만 이후 전성기를 모두 보내버리고 과거의 유산만으로 연명하는 게임회사 ‘재미난소프트’에 의외의 개발 의뢰 메일이 도착하며 시작한다. 그 메일이란 ‘무만왕국’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나라의 왕세자로부터 온 것으로, <영원한 전설>을 자국에 론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자신의 국왕 즉위식을 게임을 통해 진행하고 싶다는 조금은 황당한 퀘스트까지 더한 것이 계약의 골자다. 재미난소프트의 사업팀장 탁민은 계약의 세부사항이나 난이도야 어찌됐든 기울어가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반드시 이 계약을 성사시켜야만 한다.

일단 속는 셈 치고 건너간 무만왕국에서 탁민이 맞닥뜨린 과제는 요약하면 총 네 가지다. 첫째, 아직 폰트조차 없는 무만왕국의 언어로 대형 MMO 게임인 <영원한 전설>의 모든 텍스트를 번역해야 한다. 둘째, 게임 내에 ‘즉위식 필드’를 만들어 무만왕국의 백성들도 접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무만왕국의 백성들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본래 PC 게임이던 원작을 모바일 버전으로 컨버전해야 한다. 넷째, 이 모든 것은 즉위식이 거행될 시점 전인 한 달 기한 내에 완성되어야 한다. 만만치 않은, 아니 엄밀히 말해 불가능한 미션에 가깝지만 탁민은 그동안의 인맥을 활용해 각 분야 최고 권위자와 전문가를 초빙하여 제작에 돌입한다. 물론 즉위식조차 평탄히 진행될 리 없다. 덕분에 뜻밖의 불청객이 즉위식에 난입하고 이를 예견해 더 뜻밖의 해결책을 마련해둔 덕에 벌어지는 황당한 상황조차 게임 제작이라는 핍진한 환경과 결합해 유머 그 이상의 쾌감을 안긴다.

<앱솔루트 퀘스트>는 작중 게임 제작자들의 일상에 가장 밀착한 작품이다. 덕분에 가장 유머러스할 뿐 아니라 종사자들에게는 더욱 무릎을 칠 만한 대목으로 그득하다. 게임회사에서 온라인 게임의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 김고래는 회사에서 받는 일상적인 스트레스 덕에 꿈에서조차 꿈인 걸 인지할 만한 황당한 상황에 당혹해하다 아침을 맞기 일쑤다.

그의 고충은 회사에서 쉬지 않고 벌어지는 크고 작은 소동만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우선 서비스 중인 자사 MMORPG의 신규 업데이트를 앞둔 시점, 이미 완성된 ‘지역 입장 퀘스트’가 불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고작 들어가는 데까지 퀘스트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이를 수정하자면 다시금 검토하고 만들어야 할 것이 한가득이건만 이를 지적한 동료는 남의 일이라는 듯 아랑곳하지 않는다.

게다가 회의라는 도식적인 행위가 훌륭한 논쟁으로 이어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런 회의는 대개 “제각각의 취향 전시와 ‘난 그게 마음에 안 드는데요, 이유는 지금부터 생각하기로 하고’의 200가지 표현으로 뒤덮이기 십상”이니까. 해외 광고주의 요청에 따라 캐릭터의 성격이 바뀌고, 얄미운 동료는 은근히 자신을 따돌림하며, 모 대형 게임회사에서 잠깐 근무했던 이력이 유일한 자랑거리인 기획팀장은 바쁜 와중에도 사장과 신경전을 벌인다. 개발자들의 너무나도 생생한 ‘현실전쟁’이 대체로 우습고 가끔은 ‘웃퍼서’ 더욱 절묘한 시트콤을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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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보게 해주세요>에 실린 다섯 작품은 증강현실 게임, MMORPG, TRPG에 이르는 다양한 게임 장르만큼이나 독특한 이야기로 게임 개발자들의 현실과 이상을 이야기한다. 늘 이상은 높고 현실은 그보다 저릿하지만, 그 와중에도 게임을 향해 품은 밉고도 사랑스러운 감각이 아름다운 교집합을 이루는 작품들 일색이다. 청춘, 과거, 올드함이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게임의 한 영역을 굳건히 차지한 가운데, 각박하고도 한심한 현실이란 이름표를 달고 치고 들어오는 유머 또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가 가끔 패드와 마우스를 내팽개치던 순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더 절망하고 좌절했으며 그로 인해 더 분발했을 모든 게임 제작자들과 더불어 게임 그 자체에 바치는 절절한 헌사들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DVD2.0》《FILM2.0》《iMBC》《BRUT》 등의
매체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영화, 만화, 장르소설, 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 살았다.
『위대한 망가』『빨간 맛 B컬처』 시리즈 등을 썼다.

* 본 콘텐츠는 해당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이며, NC 공식 블로그 및 당사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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