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0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5 게임은 살아 있는 양의 꿈을 꾸는가 – 게임과 현실의 경계를 다룬 SF 작품들

영화와 만화, 드라마와 장르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 속에서 게임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알아보며 게임과 대중문화의 접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강상준 님이 들려주는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다섯 번째 편에서는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게임 혹은 가상을 닮은 현실 세계를 다룬 SF 작품들을 살펴보며 게임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 주의 ※ 본 내용은 소설 『엔더의 게임』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5 게임은 살아 있는 양의 꿈을 꾸는가 - 게임과 현실의 경계를 다룬 SF 작품들

얼마 전 미군이 이란 군부의 실세 거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암살’이라는 문구 탓인지 처음 보도될 때만 해도 대부분은 원거리 저격이나 잠입 전문 특수부대 정도를 떠올렸을 법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드론을 사용해 공습 살해한 것이 알려지면서 군사용 드론의 무시무시한 잠재력이 새로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란도 아닌 미국 본토에서 마치 게임을 하듯 드론을 조종해 목표물만 정밀 타격할 수 있는 전쟁 무기라니. 미국의 솔레이마니 암살은 사건 자체의 충격도 대단했지만, 드론 공격이 현실화됐다는 충격 역시 이에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뒤를 이어 공개된 드론 폭격 영상은 그 놀라움을 더욱 배가했다. 조감하는 드론의 시점에서 줄지어 이동하는 트럭 무리를 일제히 폭격하는 장면은 세계인의 막연한 상상력과 두려움을 곧 실체화했다. 이는 이란의 문화유산을 파괴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엄포가 결코 허투루 들리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세계 유수의 언론 역시도 이 영상을 토대로 앞다투어 군사용 드론의 실제와 현재, 나아가 당면한 위험을 논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5 게임은 살아 있는 양의 꿈을 꾸는가 - 게임과 현실의 경계를 다룬 SF 작품들

문제는 그다음이다. 알고 보니 해당 드론 폭격 영상은 <AC-130 건십 시뮬레이터(Gunship Simulator)>라는 게임의 데모 영상을 고의적으로 가공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익명의 동영상 업로더는 게임 원본 영상을 일부러 흐릿하게 만들어 가공의 그래픽임을 교묘히 감추고, 화면 우측 하단 ‘발사(Fire)’ 버튼을 비롯해 게임임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요소들을 일부러 배제하면서 전 세계 언론인들마저 착각할 법한 장면을 공들여 연출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게임이 현실을 ‘기만’한 셈이다.

해당 영상이 누군가 우리를 기만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건 분명하지만, 실은 이 경우 현실을 기만했다기보다는 현실이 기만당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는 사실 현재 게임이 목표하는 여러 갈래 중 하나이기도 하다. 즉, 좀 더 현실과 가까운 무언가가 되기 위해 진짜와 다를 바 없는 그래픽을 구현하고, 게이머의 자유도를 높이고, 유저가 게임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리고, 게이머로 하여금 현실이 아닌 게임 내에서의 지위를 향상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함으로써 마침내 현실과 게임의 위치를 역전하려는 것이 궁극의 목표인 양 보일 정도다. 물론 아직까지는 요원한 일이지만, 게임을 다룬 SF 작품 안에서는 비일비재한 상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한순간이나마 게임 영상을 토대로 불안과 참상을 체화했던 것처럼 더 이상 시뮬레이션 게임이 시뮬레이션(모의실험)에 그치지 않는 사례 또한 차고 넘친다.

1986년 휴고상 최우수 장편상 수상작인 SF소설 『엔더의 게임』(오슨 스콧 카드 저)은 곤충형 외계인 ‘버거’와의 전쟁 이후 또다시 닥칠지 모르는 외계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훈련받는 소년병의 이야기를 다룬다. ‘엔더(Ender, 종결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주인공 앤드류 위긴은 훈련을 거듭하며 군의 우수한 지휘관으로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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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소년 지휘관들의 훈련 과정은 오롯이 버거와의 전쟁을 가정한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형상화된다. 위긴은 시뮬레이션 게임이 제시하는 갖가지 난관을 넘어서며 마침내는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라 여겨졌던 마지막 테스트까지 다다른다. 그 마지막 테스트란 소수의 구식 함대만을 이끌고 버거들이 득시글거리는 모성에 돌격해 초토화시키는 것. 위긴은 황당하리만큼 높은 난이도에 아연실색하지만, 곧 천재적인 기지와 전술을 발휘해 마침내 테스트에 통과한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위긴의 테스트를 지켜보던 훈련관들은 일제히 환호한다. 사상 처음으로 마지막 레벨을 통과한 그가 자랑스러웠기 때문일까?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사실 지금까지의 게임이 모두 시뮬레이션임을 가장한 진짜 전쟁이었던 탓이다. 그러니까 위긴이 조종하고 지휘한 것은 실제 군인과 함대였으며, 그는 열악한 조건으로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해 마침내 인류의 위협이던 버거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만약 살아 있는 군인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가능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슬그머니 진실을 가린 덕분에 목표에 죄의식 하나 없이 ‘손쉽게’ 다가설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다. 실제를 ‘가정’한 게임이란 점만으로도 얼마든지 현실을, 진실을, 심지어 인명의 존귀함마저 기만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5 게임은 살아 있는 양의 꿈을 꾸는가 - 게임과 현실의 경계를 다룬 SF 작품들

제라드 버틀러가 주연한 2009년작 영화 <게이머>는 <슬레이어즈>라는 온라인 FPS 게임에 열광하는 미래 사회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의 도입부는 양 팀으로 나뉘어 총격전을 벌이는 일반적인 게임 장면인 양 시작되지만 어째 수상한 기운이 곳곳에서 물씬 피어난다. 실제와 진배없는 정교한 그래픽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을 비롯해 불안에 잔뜩 떠는 게임 캐릭터 케이블의 모습이 그렇다. 특히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케이블보다 더디게 반응하는 그의 몸동작은 더욱 의심쩍다. 사실 게임 <슬레이어즈>는 사형을 앞둔 죄수들을 게임 캐릭터 삼아 조종하는 것으로, 실제 전쟁을 방불케 하는 리얼리티 덕에 이 시대 막대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것이다. 인간의 뇌를 한순간 장악하는 칩 기술을 기반으로 원거리에 있는 유저가 살아 있는 인간을 통제하면서 마침내 진짜나 다름없는, 아니 ‘진짜’ FPS 게임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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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혁명적인 시스템이 단순히 FPS 게임에 한정될 리 없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아바타로 살아 있는 인간을 내세워 온라인상에서 또 다른 현실에 몰입한다. 순순히 누군가의 아바타가 되기 위해 자기 뇌를 내어준 사람들의 속내 역시 너무나도 단순하나니 바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저의 선택에 따라 마치 그래픽으로 구현된 게임 캐릭터처럼 온갖 휘황찬란한 복색과 헤어스타일을 하고 무감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충분히 그로테스크하지만, 영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어두운 방 안에서 화면을 통해 진짜 인간을 조종하며 즐기는 사람들이 곧 여기 대조되면서 살풍경한 두 가지 현실에 두 번 절망케 만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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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가 다루는 게임에는 가상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 그 자체가 게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게임처럼 가상과 현실이 아닌, 현실과 현실이 대구를 이루는 것. 그럼에도 그 어느 쪽도 현실이라고 말하기엔 참담하기 그지없다. 인간성을 스스로 놓아버린 캐릭터들과 인간을 조종하며 저열한 욕망을 충족하는 또 다른 인간들. 그리고 뭐가 됐든 돈을 버는 게 중요한 게임사. 가상 너머에서 현실에 완전히 침투한 게임, 그리고 그런 게임에 잡아먹힌 세상 어디에도 우리가 바라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영화는 획기적인 기획력과 이를 현실 세계에 안착시킨 독특한 미술이 무엇보다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결과적으로 맥이 빠질 만큼 허탈한 결말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첨예한 주제를 참신한 아이디어로도 승화하지 못했다니 무척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 씁쓸한 뒷맛만큼은 충분히 곱씹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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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자와 켄고의 만화 『르상티망』의 배경은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 ‘실체화’된 2015년의 미래다. 어쩌다 보니 작중 시점은 2020년 우리의 현재보다도 과거가 됐지만 이 작품이 처음 연재된 것은 2004년으로 작가는 약 10년 후의 가까운 미래를 상정해 소위 ‘인셀(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주의자)’들의 가상현실상 반란을 그려냈다.

인쇄공장에 다니는 서른 살 타쿠로는 뚱보에 대머리, 누가 봐도 추남에 자신감도 없어 당연히 아직까지 여자와 사귀어본 적이 없다. 그러던 중 친구 에치고로부터 최신식 ‘미연시’인 <노아의 방주>라는 게임을 소개받는다. 최신식이라는 수사 그대로 헤드기어와 감압 글러브, 수트 등을 착용하고 실제 감각을 유지한 채 정말로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게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게임 캐릭터인 미소녀 NPC들이 모두 강(强)인공지능으로 구현되어 스스로를 인간으로 인식한 채 정해진 설정을 바탕으로 인간과 흡사한 말과 행동을 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미소녀들은 애초에 모두 유저를 좋아하도록 만들어졌다. 당연히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게임인 탓이다. 타쿠로는 그 즉시 저금을 털어 게임 장비와 소프트웨어인 ‘츠키코’를 구입한 후 가상현실에서의 연애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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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초반부는 마땅히 타쿠로를 좋아하도록 설계되어야 했을 NPC 츠키코가 이상하게도 그를 배척하거나 미남 아바타로 가장한 가상현실과 비루한 현실의 극명한 대비 등을 통한 코미디로 적당히 눙친다. 그러나 그 코미디도 곧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선회한다. 타쿠로가 점점 몰입하는 <노아의 방주>만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마땅히 도망칠 곳조차 없었던 루저들의 새로운 현실로 자리하기 충분하니 그렇다면 이곳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 아니냐는 생각에까지 다다르는 것이다. 어쨌든 그곳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르상티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누구보다 특별한 NPC 츠키코가 사실 이 시대 온라인 시스템의 모태가 된 AI라는 진실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가상현실 세계는 전에 없던 혁명을 향해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한다.

『르상티망』의 가상현실은 타쿠로가 몰입하는 <노아의 방주> 같은 ‘미연시’ 게임만이 아니라 판타지 배경의 RPG,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 현실세계와 흡사하게 구현한 공간 등 온갖 장르의 게임이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초대형 MMO를 표방한다. 게다가 게임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의 온라인 모두 ‘언리얼 온라인 시스템’하에 통제되고 있다. 즉, 교통, 금융을 비롯해 군사시설까지 모두 하나의 시스템으로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츠키코를 손에 넣은 현실 세계의 루저들, 즉 방구석에 앉아 가상현실 게임에만 몰두하던 게이머들이 마침내 현실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핵폭탄 스위치마저 누를 수 있게 된 이유다. 이 경우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희미해진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이 현실 세계를 직접 포격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마치 영화 <트론: 새로운 시작>처럼.

지금까지 게임은 대체로 현실을 모사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VR 기술 등이 목표하는 바 그대로 게임은 점점 더 현실 너머에서 또 다른 현실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작품들이 게임으로의 현실 도피를 다루고, 게임에서의 불가해한 모험을 현실로 이끌어오다 이윽고 가상현실이 경계를 넘어 현실로 다다른 이야기로 치닫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SF작가 테드 창은 “SF는 변화를 다루는 장르로, 필연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상상이나 예견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경고, 아니 혹여나 바람은 아닐까?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DVD2.0》《FILM2.0》《iMBC》《BRUT》 등의
매체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영화, 만화, 장르소설, 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 살았다.
『위대한 망가』『빨간 맛 B컬처』 시리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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