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0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로그 호라이즌 – 바뀐 세상을 바꿔가는 법

영화와 만화, 드라마와 장르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 속에서 게임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알아보며 게임과 대중문화의 접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강상준 님이 들려주는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여섯 번째 편에서는 한순간 게임 속 세계에 갇힌 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모험담을 담은 애니메이션 <로그 호라이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6 로그 호라이즌 - 바뀐 세상을 바꿔가는 법

생각해보면 인간이 사회에 발 딛고 살아가는 과정 모두는 정해진 수많은 규칙을 따르는 일과 다름 아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부터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먹고사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세상 거의 모든 것에는 일종의 규칙, 정해진 작동 원리가 뒤따른다. 단지 대부분의 것들을 충분히 ‘체화’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은 채 행동할 뿐. 예컨대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충분한 잠을 자야 한다는 것들은 이미 머리로 이해하는 단계는 넘어선 것으로 이제는 너무나도 당연한 ‘생활방식’이다.

이런 대부분의 규칙은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다 어느 순간에 이르면 수명이 다하는 자연의 법칙 위에 설계된 것이다. 그러니 만약 더 이상 이 모든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면 우리는 이제까지의 생활방식은 물론 사고방식마저 바꿔야 할 게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어떤 게임이라도 처음 그 세계에 들어선 순간 우선 게임이 제시하는 새로운 규칙을 익혀야만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튜토리얼’을 통해 대강의 규칙을 이해한 다음에는 게임을 해나가면서 점차 새로운 세계의 룰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체화’하곤 했다.

단지 그런 정도의 경험이라면 게임의 본래 목적 그대로 대개는 유희로 삼을 만할 규칙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법칙이 전원을 끈 다음에도 지속된다면, 아니 아예 우리의 세상 그 자체가 된다면 그것은 이미 유희라고 하긴 힘들지 않을까? 어쩌면 <로그 호라이즌>의 게이머들이 명명한 그대로 ‘대재해’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6 로그 호라이즌 - 바뀐 세상을 바꿔가는 법

애니메이션 <로그 호라이즌>은 동명의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게임 세계가 한순간 진짜 현실이 되었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MMORPG <엘더테일>의 열두 번째 확장팩 ‘누스피어의 개간’이 패치되는 순간, 당시 접속 중이던 유저들은 평소 즐기던 게임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일본 내에서만 약 3만 명의 유저가 새로운 세계에서 어리둥절하는 사이 주인공 시로에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동료들과 함께 게임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여타의 ‘게임 판타지’ 장르처럼 게임 세계가 현실화된 것은 <로그 호라이즌>에서도 마찬가지다. 게이머들은 허공에 스탯창을 띄우고, 서로 친구 등록을 한 후 염화(念話)로 통신한다. 하지만 <로그 호라이즌>이 무게를 둔 부분은 몬스터 사냥이 생활화된 판타지 세계에서의 모험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법칙으로 구성된 신세계에 ‘적응’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엘더테일>은 지금 우리 시대의 MMORPG와 마찬가지로 VR이 아니라 일반 모니터를 통해 즐기는 게임이다. 그러니 갑작스레 캐릭터 그 자체가 되어 마우스나 패드가 아닌, 실제로 몸을 움직여가며 무시무시한 몬스터들과 맞닥뜨려 싸우는 일이 결코 녹록할 리 없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6 로그 호라이즌 - 바뀐 세상을 바꿔가는 법

게다가 하나뿐인 목숨을 그대로 게임에 이식한 다른 작품과 달리 <로그 호라이즌>의 ‘모험자’, 즉 게이머는 죽어도 금세 대신전(大神殿)에서 부활한다. 불사의 몸을 갖게 되었다고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다. 삶의 목적조차 불분명해진 채로 그저 영원히 살아가기만 한다는 것은 오히려 고통에 가까울 테니까. 게다가 완전한 불사도 아니다. 죽음이 반복될수록 실제 세계의 기억이 조금씩 소실되기에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실제로 모험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무기력증에 빠진다. 적당히 사냥만 한다면 아주 적은 돈으로도 끼니를 때우고 수면을 취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상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아이템을 조합해 먹음직스러운 산해진미를 만들어도 골판지를 씹는 것 같은 맛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맛이 느껴지지 않는 음식을 오직 살기 위해 먹는 행위를 반복할수록 더더욱 살아있음을 체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사냥과 전투가 허락되는 무법지대가 되었으니 이 뜻밖의 상황을 통제하기보다는 약자를 억압하고 이용하려는 무리가 나타나기도 한다. 일부 길드는 보호라는 명목하에 초보 유저를 감금한 채 각자의 보조 직업을 사용해 쉬지 않고 생산품을 양산하도록 강제한다. 또 대재해를 통해 ‘대지인’이라 불리는 NPC들 역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지성과 개성을 지니게 되었음에도 본래 프로그래밍된 인공지능에 불과하단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험자들에게 괄시당한다. 아니, 아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6 로그 호라이즌 - 바뀐 세상을 바꿔가는 법

시로에가 동료들과 함께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하나둘 타개해가는 과정은 곧 새로운 환경에서 다함께 살아가기 위한 ‘규칙’을 만드는 일과 다름 아니다. 자연히 이 새로운 세계가 진짜 자신들의 현실이 된 만큼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핍진한 과정 역시 색다르게 다가온다. 우선 진짜 맛을 느낄 수 있는 요리법을 보급하면서 곧 무기력하던 사회에도 차츰 활력이 돈다. 이제야 인간다운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맛이 담긴 요리를 사먹기 위해서는 적당히 살아만 가는 수준 그 이상의 돈이 필요한 탓이다. 공급을 뒷받침하는 수요가 생겼으니 자연히 경제가 일궈진다. 생산과 소비가 뒤따르는 생활이 시작되면서 삶에 목적이나 의미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윽고 모험자들은 생산 전문 길드가 중심이 되어 현실 세계의 기술과 게임 캐릭터 고유의 기술을 접목해 증기기관 같은 판타지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던 기술을 발명하는 등 사회는 계속해서 진보한다. 그리고 마침내 시로에는 대형 길드가 주축이 된 의결 기구인 ‘원탁회의’를 설립한다. 원탁회의는 이 땅의 원주민인 대지인의 인권을 인정하고, 보다 체계적으로 세계의 발전과 안정을 도모한다. 드디어 이곳에서도 ‘인간 사회’가 그럭저럭 꼴을 갖춘 셈이다. 시로에와 그의 동료들은 바뀐 세계에서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험자라는 정의 그대로 그렇게 세계를 바꿔나가는 길을 택한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6 로그 호라이즌 - 바뀐 세상을 바꿔가는 법

물론 문제는 내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중세 판타지라는 게임의 설정 그대로 왕정 국가를 이루고 있던 대지인들 역시 모험자들이 ‘대재해’라 일컫는 사건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알고 있다. 예전에는 적당히 보수만 챙겨주면 몬스터 퇴치나 물자 운반 같은 귀찮은 일도 마다하지 않던 모험자들이 어느새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사회를 구축한 채 자신들의 요구는 아랑곳하지 않으니 불편을 넘어 이는 곧 위기가 된다. 게임을 할 때처럼 한가롭게 퀘스트나 수행할 수 없게 됐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이를 이해할 리 없는 대지인의 왕국 이스탈이 모험자 개개인의 강력한 전투력을 경계하다 마침내 힘겹게 상호 교류에 다다르는 과정은 과연 독특한 상상력 덕에 생경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이후에도 모험자라는 이질적인 존재를 이용하려는 대지인 세력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대지인 내에서도 여러 의견이 상충하면서 원주민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원탁회의의 대원칙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게다가 초보 게이머들이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이들을 체계적으로 성장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주기적으로 제공되던 대형 사냥 이벤트에 한눈 판 사이 유저 페널티로 몬스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도 하는 등 좀처럼 삶을 방관할 틈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전진이 생존을 넘어 생활을, 생활을 넘어 인생으로 나아가는 당연한 수순을 밟아감에도 새삼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6 로그 호라이즌 - 바뀐 세상을 바꿔가는 법

<로그 호라이즌>은 주인공 시로에가 과거 ‘방탕아의 티파티’라는 전설적인 게임 그룹의 동료를 규합하고 초보 유저들을 뒷받침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길드 ‘로그 호라이즌(기록의 지평선)’을 성립하는 과정 그대로 시종일관 ‘협력’에 방점을 찍는 작품이다. 파티 안에서 각자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는 작은 전장부터, 시로에가 특유의 기지와 책략으로 모험자 사회에 닥친 위기를 타개해나가는 큰 전장에 이르기까지, 늘 작품 곳곳에서 여러 캐릭터의 능력과 개성은 온전히 발휘된다.

판타지 게임이라는 본래의 배경 그대로 여러 유저와 협력해 전투를 벌이는 과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중 하나다. 제각기 주어진 역할에 맞게 행동하는 순간 특별한 화학작용을 일으켜 파티가 레벨 이상의 진가를 드러내는 것마저도 여럿이 손을 맞잡아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는 메시지와 상통한다.

<로그 호라이즌>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 이후 모든 법칙이 새로이 정립되는 사이 다함께 현실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가 대개 참혹한 전투에 뛰어들기 일쑤인 현실적인 게임 판타지 작품 이상으로 흥미로운 건 바로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정말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원천적인 조건들과 그대로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임이 현실로 ‘바뀐’ 것이 아니라 게임을 현실로 ‘바꿔가는’ 이들의 인생이 모험이라는 이름과 너무나도 어울리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DVD2.0》《FILM2.0》《iMBC》《BRUT》 등의
매체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영화, 만화, 장르소설, 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 살았다.
『위대한 망가』『빨간 맛 B컬처』 시리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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