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9 게임과 심리학

게임과 심리학 #12 게임이 수행하는 은밀한 기능들

심리학의 관점에서 현 시대의 게임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게임과 심리학’.

문화심리학자 이장주 박사가 들려주는 ‘게임과 심리학’ 12편에서는 게이머들의 심리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게임의 숨어있는 기능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게임과 심리학 #12 게임이 수행하는 은밀한 기능들

우리가 매일 습관처럼 하는 일상적인 행동들은 항상 좋아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숨 쉬는 것이 좋아서, 한시도 쉬지 않고 숨을 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게임을 일상적으로 즐기는 게이머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게임을 한다는 것은 오로지 재미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지 않았을 때 채울 수 없는 심리적, 사회적 욕구가 은밀하게 숨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게임이 수행하는 은밀한 기능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아의 성장: 순종과 반항의 통합 과정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게임이 과도하게 공격적이거나 폭력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보편적으로, 공격이나 폭력이 나오는 상황은 자신의 자율적인 의지가 억압될 때입니다. 이런 억압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순종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권위와 권력의 요구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순종이라면, 이에 대항하여 자신의 자율성과 자발성을 지키고자 하는 행동을 반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종과 반항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 다닙니다. 마치 밤과 낮이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상반된 모습이 균형감 있게 존재해야 하죠.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상반된 모습이 균형감 있게 존재해야 하죠.


순종이 지나친 사람에게는 열정이 없는 기계 같은 행동이 나타납니다.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진실되지 못한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소외(alienation)라고 부르지요.

소외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반작용인 반항도 같이 강해집니다. 마치 숨을 내쉬기만 하고 들이쉬지 못하는, 물이 담긴 세면대에 얼굴을 담근 상황과 유사해지는 것이죠. 그 반대도 성립합니다. 반항이 커지면 순종의 압력도 함께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자아가 성장한다는 것은 이런 모순적인 속성들을 통합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흔히 청소년 시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이런 통합의 연습이 격렬하고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게임에 몰두하는 게이머들, 특히 청소년들은 권력의 크기가 작기에 대부분 순종이 강요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순종만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청소년들은 스스로 자율성과 독립성을 시험하고 통합하는 연습을 하고자 합니다.


스스로 통제하고 조작하여 끝내 성취를 이루는 기쁨!

스스로 통제하고 조작하여 끝내 성취를 이루는 기쁨!


저는 이런 연습이 안전하게 일어나는 공간과 기회가 바로 게임이라고 믿습니다. 이들이 온라인상에서 때리고 부수면서 연습하기에, 오히려 현실에서는 이런 문제가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과도하게 게임에 몰두하는 것은 자율과 통제의 균형이 무너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냥 내버려두면 게임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공포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율과 고립을 연결시키는 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에드워드 L. 데시(Edward L. Deci) 교수는 주장합니다[1]. 참고로 그는 ‘자기결정성이론(#11 참조)’을 만들어 낸 심리학자이기도 합니다. 데시는 오히려 진실하게 행동하고 자율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이 다른 이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발적인 동기부여가 삶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에드워드 L. 데시 교수의 강연


국내에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현산업정보고등학교의 방승호 교장선생님은 공부에 흥미가 없고 게임만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하루 종일 게임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게임을 통해 글쓰기와 영어를 가르치니 아무도 졸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업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합니다. 참 감동적인 사례죠.


자기 가치 확인의 매개체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잘난 맛을 느끼는 사람은 설령 남들에게 좋지 못한 평가를 받더라도 상처를 덜 받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내가 운동은 못하지만 노래는 잘해’, ‘내가 못생기긴 했지만, 머리는 좋아’, ‘나는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났지만, 운동은 끝내주게 잘해’. 이런 생각들은,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믿을만한 근거가 됩니다.


말해 뭐해? 이렇게나 대단한데!

말해 뭐해? 이렇게나 대단한데!


사회심리학자 스틸(Steele)은 이런 현상을 ‘자기 가치 확인 이론(Self-affirmation theory)’이라고 불렀습니다[2]. 이 이론은, 사람은 자신에 대해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지각을 하려 노력하며, 자신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다른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자기 이미지(self-image)를 방어하려 한다고 설명합니다.

자기 가치를 확인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긴장을 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면접이나 시험에서 더 우수한 성과를 내고, 따돌림 당하는 비율도 적었습니다. 또한 금연에 성공할 가능성도 더 높았죠. 이처럼 많은 상황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아무도 도와주기 어려운 위기의 상황에서 나를 구해주는 마법의 주문이었던 겁니다[3].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경쟁의 장에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좋은 자기 가치 확인의 기회가 됩니다.

게임보다 여기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아마 찾기 어려울 듯합니다. ‘다른 것은 서툴러도 게임에선 나를 이기기 어려울걸?’, ‘우리 반에서 내가 탱킹을 제일 잘 하지’, ‘슈팅 게임 피지컬은 내가 최고지’와 같은 다양한 가치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게임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게임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특히 게임을 잘하기로 소문난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전 세계 어느 나라 게이머를 만나도 절대로 주눅이 들지 않습니다. ‘내가 한 수 가르쳐 주마’ 하면서 말이죠.

이렇듯 게임은 자투리 시간을 즐기는 여흥을 넘어, 쉽고 저렴하게 심리적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든든한 보고였던 것입니다. 이런 게임을 ‘그까짓 게임이나’라고 폄하한다면, 그것은 게임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인격모독이 될 수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운동이나 공부를 통해 자기 가치를 확인한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게임을 통해!

누군가는 운동이나 공부를 통해 자기 가치를 확인한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게임을 통해!


사회적 유대감을 위한 연결고리

누군가에게 배척받는 사회적 상황은 실제 신체적 부상을 입었을 때와 같은 고통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통을 신체적 고통과 구분하기 위해서 사회적 고통(social pain)이라고 부릅니다.

리버만(Lieberman) 교수팀은 연구참여자 13명에게 ‘사이버볼(Cyberball)’이라는 컴퓨터게임을 하게 했습니다[4]. 서로 사이버볼을 주고 받는 게임을 하면서 뇌 활동을 측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참가자에게 몇 번 공을 주었지만 점점 참가자를 따돌렸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주고받으며 참가자에게 소외감을 일으켰습니다.


리버만 교수팀의 사이버볼 실험

리버만 교수팀의 사이버볼 실험


이때 활성화된 뇌의 부위가 신체적 고통을 처리하는 부위와 동일했습니다. 사회적 거부와 단절은 신체적 고통과 유사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뇌 부위

신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뇌 부위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정신 건강뿐 아니라 신체 건강에도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생기는 스트레스는 면역 기능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들은 다양한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합니다[5].

이런 연구들은 ‘왜 우리나라 게이머들은 다양한 게임을 즐기기보다, 몇 종류의 인기 게임에 열광하는가’에 대한 통찰을 줍니다. 인기 있는 게임들이 재미있어서라기보다,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수단으로 그 게임을 선택했다는 해석도 가능해집니다.


주변 친구들 모두 비슷한 게임을 하고 있지 않나요?

주변 친구들 모두 비슷한 게임을 하고 있지 않나요?


거꾸로 표현하면, 재미있어서 게임을 선택하기보다는 소외되기 싫어서 친구들이 하는 게임에 동참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주변의 친구들이 다 하는 게임을 못하게 하는 것은 신체적 상처와 같은 고통을 유발하는 폭력이 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더 큰 건강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표면적으로 게임은 즐거움을 얻고자 플레이합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을 유발하는 이면에는 건강과 적응에 아주 중요한 자기 통합, 가치 확인, 사회적 유대 관계 형성 등의 숨은 기능들이 있었습니다.

게임을 과도하게 해서 문제가 된다면 게임 자체에만 초점을 맞춰선 안됩니다. 단순히 게임을 못하게 막을 것이 아니라, 게임이 담당한 기능들을 대체할 수 있는 더 좋은 수단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것이 게임 이용 시간을 줄이고 채워지지 못한 심리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제가 아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게임을, 그리고 게임을 하는 우리를 사랑해주세요.

게임을, 그리고 게임을 하는 우리를 사랑해주세요.


지난 1년 동안 저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 문헌

[1] Deci, E. L., & Flaste, R. (1995). Why we do what we do: The dynamics of personal autonomy.『마음의 작동법』 이상원 옮김. 에코의서재.

[2] Steele, C. M. (1988). The psychology of self-affirmation: Sustaining the integrity of the self. In Advances in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Vol. 21, pp. 261-302). Academic Press.

[3] Kang, S. K., Galinsky, A. D., Kray, L. J., & Shirako, A. (2015). Power affects performance when the pressure is on: Evidence for low-power threat and high-power lift.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41(5), 726-735.

[4] Eisenberger, N. I., & Lieberman, M. D. (2004). Why rejection hurts: a common neural alarm system for physical and social pain.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8(7), 294-300.

[5] Vaillancourt, T., Duku, E., Decatanzaro, D., Macmillan, H., Muir, C., & Schmidt, L. A. (2008). Variation in hypothalamic–pituitary–adrenal axis activity among bullied and non‐bullied children. Aggressive Behavior: Official Journal of the International Society for Research on Aggression, 34(3), 294-305.


이장주

이장주

문화심리학자.
평범한 사람들이 더 활력 있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다
게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재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심리학의 관점에서 문화적 이슈를 다루는
글쓰기와 강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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