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2 Eye on Game

게임으로 과학의 비밀을 밝혀내다


‘집단의 힘’으로 열리는 연구의 새로운 길

정신 줄 놓은 게임의 대명사 <BORDERLANDS 3 (이하 보더랜드 3)>에 독특한 콘텐츠가 추가됐다. 제목에서부터 돌직구 포스가 뿜어져 나오는 <보더랜드 과학>이다. <보더랜드 3>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이 퍼즐게임에는 걸쭉한 대사들이 남발하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체내 미생물 구조 파악을 돕는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다.

오묘한 재미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 ‘정답’이 사라진다. 제시된 최고점은 AI의 답안이다. 그리고 제시된 최고점 이상의 답을 낼 가능성이 존재한다. 최고점을 초과 달성하면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인공지능보다 뛰어남을 증명한 셈이니 알파고에게 비웃음을 날려도 좋다.

<보더랜드 과학> 퍼즐. 최고점 이상을 내면 인간이 AI보다 낫다는 증거가 된다.


과학의 발전은 때론 아주 작은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된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던 순간이나 도자기 접시를 보며 단단한 연필을 떠올린 콩테처럼. 콜럼버스의 달걀 일화를 들은 누군가는 “나도 저 생각이었어”라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해답이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바꿀 발견이 된다.

다양한 의견을 가진, 문자 그대로 ‘많은’ 사람이 가지는 의의가 또 있다. 데이터 확인과 검증이다. 연구자는 많은 시간을 실험 자료와 결과 확인, 검증에 할애한다. 그중에는 관련 지식이 필요 없는 경우도 있다. 단순하지만 꼭 필요한 작업을 많은 사람들이 대신할 수 있다면 연구 속도는 굉장히 빨라진다. 검토해야 할 자료 10,000장이 있을 때, 열 명이 모이면 1,000장씩 봐야 하지만 만 명이 모이면 한 장만 봐도 된다. 집단의 힘이다.

이렇게 집단의 힘을 연구에 도입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그리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작업에 알게 모르게 자신의 힘을 보탠 경험이 있다. 그중 하나가 ‘로봇이 아닙니다’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reCAPTCHA>다. 과거 흐릿하게 나온 문자를 옮겨 적는 방식은 문자 판독이 어려운 오래된 문서를 해독하는데 쓰였다. 최근 부쩍 늘어난 도로 표지판이나 자동차, 횡단보도가 있는 그림을 선택하는 방식은 자율 주행 기술 발전을 위한 자료 수집에 사용된다.

표지판을 찾기 귀찮을 때마다 운전석에 앉아 편하게 목적지까지 가는 상상을 해보시라.

 

단백질 구조를 밝혀낸 <Fold It>

게임에서는 이보다 더 전문적인 영역에서 다양한 사람의 창의력을 동원하는 시도가 이어진다. 아미노산 배열 퍼즐인 <Fold It>이 대표적 사례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기 때문에 단순한 작업 이상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이 게임 유저들이 에이즈 치료제 개발에 필요한 단백질 구조를 밝혀내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AI로도 풀기 어려운 문제를 사람이 풀어냈다.

<Fold It>은 결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게임도 아니다.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 특정 블록은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서도 안된다. 같은 조건들과 블록 종류에 따른 조작법 및 몇 가지 도구 사용법을 익힌다. 시작은 대부분의 퍼즐 게임이 그렇듯 단순한 구조다. 스테이지를 거듭할수록 플레이어의 직관력과 구조 해석 능력이 올라가는 만큼 퍼즐도 복잡해진다. 실제 바이러스 수준까지 가면 처음 보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구조가 나오지만 게임을 꾸준히 했던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알아보고 공략을 시도할 수 있다. 마치 <네모네모 로직>의 보드와 비슷하다.

이 게임의 흥미로운 점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점수를 내면 클리어 판정을 받을 수 있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높은 점수를 낼 수도 있다. 그리고 점수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처음 주어진 모양에서 약간 수정하거나, 아예 새로운 구조로 도전해도 된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다양한 해법을 가지고 최적의 모델을 찾아내는 일.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코로나 치료제를 찾기 위해 모여든 게임 유저들

지금 <Fold It>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을 위한 퍼즐을 제공하고 있다. 전 세계 20만 유저가 퍼즐을 해독 중이다. 그중 고득점을 얻은 모델은 미국 연구소에서 실제로 만들어 실험해보기도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치료제가 <Fold It>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한 몇 가지 룰을 알면 플레이할 수 있다. <Fold It>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가능하다.


과학의 원리는 몰라도 게임의 룰을 따른다면

<보더랜드 과학>은 <Fold It>과는 궤가 다르다. 단순한 자료 검증이다. 간단한 퍼즐로도 체내 미생물 DB 오류 검증이 가능하기에 난도가 낮아 참여가 쉽다. <Fold It>이 각 잡고 앉아 풀어야 하는 복잡한 퍼즐이라면 <보더랜드 과학>은 심심할 때 편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간단한 퍼즐이다. 의미 있는 일이 항상 어려운 법은 아니다. 컴퓨터가 찾아내지 못하는 오류, 컴퓨터가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부분을 사람의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메꾼다. 횟수가 많을수록 더 정교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기에 숫자 자체가 가지는 의의도 크다.

<보더랜드 과학>은 게임에서의 이런 시도가 의미 있는 여러 이유를 보여준다. <보더랜드 과학>을 플레이하는 유저는 DNA나 AGCT가 무엇인지 모른다. 몰라도 된다. 원리는 만드는 사람만 알면 충분하다. 연구진은 알아보고 싶은 내용을 퍼즐로 풀 수 있도록 핀 포인트로 설계했다. 그 외 나머지 복잡한 과학적 원리가 있겠지만, 길게 설명하는 대신 룰이라는 이름으로 제약을 걸거나 아예 게임 플레이에 영향이 없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유저는 미생물학이나 유전공학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연구진은 과학적 원리와 실험 환경을 기반으로 게임의 룰을 만든다. 데이터는 검토하는 사람이 혼동하지 않도록 깔끔하게 구성했다. 이해와 응용이 쉬운 명확한 룰과 간단하고 혼동 없는 UI는 게임에서 항상 추구하던 요소다. 적당한 난이도 조절도 한몫했다. 게임 업계는 복잡한 룰을 단계에 따라 차근차근 이해시키는 노하우가 있다. 난도를 높여 실제에 가까운 룰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테이지 공략형 모바일 매치 3 퍼즐 게임은 스테이지가 거듭될수록 특수한 블록과 조건이 많아지지만, 게임을 꾸준히 한 사람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다.

스테이지가 올라갈수록 점점 복잡해지지만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한다.


재미와 보상으로 이끌어 낸 자발적 참여

우리는 재미를 느끼고 싶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게임을 한다. 가끔은 지하철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끄적거릴 수 있는 한붓그리기나 블록 채우기 같은 게임을 하기도 한다. <보더랜드 과학>은 이런 가벼움을 활용한 예다. 너무 복잡해 쉽게 포기할만한 난이도도 아니지만, 너무 쉬워 심심한 수준도 아니다. 기능성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게임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간단하지만 다양한 응용이 가능한 룰과 독특한 그래픽, 사운드로 유저를 사로잡는다.

적절한 게임 내 보상도 제공한다. 하지만 보상보다 중요한 점은 게임 자체의 재미다. 재미가 없다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호기심과 사명감에 조금은 할 수 있겠지만 오래 지속되진 않는다. 재미가 있으면 봉사가 아니라 놀이가 된다. 더 많은 사람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면서도 그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 게임의 재미가 어떻게 다양한 사람의 의견과 창의력을 동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잘 만든 게임은 세상의 발전에 기여한다.

<보더랜드 과학> 트레일러 영상


[Eye on Game] 게임업계 RE 열풍, 어디까지 불까 김강욱

김강욱

게임 칼럼니스트.
다양한 채널에 글을 쓰며
게임의 가치를 알리려 노력한다.
종합 문화 콘텐츠이자 차세대 주류 문화로서
게임이 인정받는 세상을 꿈꾼다.

* 본 콘텐츠는 해당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이며, NC 공식 블로그 및 당사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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