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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과 장르미학 #5 활극의 공통계: 자유로부터의 해방, 플레이의 아우토노미아
세계관과 장르미학

활극의 공통계: 자유로부터의 해방, 플레이의 아우토노미아

플레이와 자유 자유란 무엇인가? 대의 민주주의 정치와 자본주의의 생산양식 하에서 ‘나’라는 개별자가 인식하는 자유란 언제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매 순간마다 자유와 규율의 양자택일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신호를 위반하고 지나갈 것인가, 정지할 것인가. 쓰레기를 길에 버릴 것인가, 주머니에 넣을 것인가. 줄을 설 것인가, 새치기를 할 것인가.' 이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향유하고 지키는 규범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만이 규율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자신의 내면의 신성한 목소리(소크라테스가 다이몬이라고 표현한)에 귀를 기울이는 인간은 내적 규율과 자유 사이에서도 갈등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도울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와 같은 도덕률의 문제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을 살 것인가, 아니면 저축을 할 것인가. 잠을 잘 것인가, 공부를 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에서 '짜장면이냐 짬뽕이냐'까지 실로 광범위하다. 철학에서 자유는 수천 년간 숱한 논쟁을 만들어낸 유서 깊은 주제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유’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과 별개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내키는대로 자유롭게 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동차를 사고 싶다, 비싼 가방을 사고 싶다, 멋진 연인을 만나고 싶다, 집을 사고 싶다,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고 싶다' 등 소비나 소유에 관한 것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부자건 빈자건, 상대적 빈곤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전제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실상 그 어떤 물적 욕구도 완전히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헤겔은, ‘자유’와 ‘자의’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생리적·물리적으로 무엇이든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 는 자유가 아니다. “나는 자유인이니까 널 죽이는 것도 자유야!” 도 자유가 아니다. 본능적, 충동적 자의는 엄연히 자유와 대척점에 서 있다. 자유의지의 강력한 지지자 헤겔은 ‘자유’와 ‘자의’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헤겔은 역설적으로 자유를 가장 강하게 비판하면서, 자유의 곡창지대에 얽혀진 ‘자의’라는 잡초를 베어낸다. 이기적 개인의 이해관계, 배타적 욕구 등의 충동은 공동체의 상호주체적 감각과 대척점에 있다. 헤겔에 따르면,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즉자적인 욕구를 제어하기 위해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자의를 규제할 수 있는 규율 장치”로서 외적 폭력의 체계, 국가와 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자유”라는 개념은 종교·정치·산업혁명 시기 근대 국가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테마였으며, “규율”과 언제나 변증법적으로 얽히며 진보해 왔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규율을 강제하는 억압적 국가기구(repressive state agency)에 외적 폭력을 일임해야만 하는 개인, 그리고 이들의 목소리를 하나의 절대정신으로 매개하는 법과 국가는 헤겔의 구상처럼 이상적으로 형성되지는 않았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공공의 이익과 자유라는 미명 하에 고도의 감시 권력이 국가 차원에서 행사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두 눈을 멀게 했던 오이디푸스처럼, 끝없이 정상을 향해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자유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좋든 싫든 인간은 자유로부터 억압받거나, 도피하거나, 혹은 자유를 향해 내면의 봉화에 불을 지피는 존재이다. 인과론적 운명과 대적하는 자유의 알레고리들. <오이디푸스 왕>은 충동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의 운명과 대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그린 가장 오래된 우화이며, <가타카>(1997)는 인류 공통의 진보와 이익을 위해 구조화된 인과론적 불평등과 대결하는 초인의 분투를 소묘한다. 반면 <이방인>(1942)과 <시계태엽 오렌지>(1962)는 일련의 반인륜적 사건들을 통해 ‘배타적 자의’를 생산하는 사회 문화적 상징체계를 공격하고, 이를 규율로 억제할 수 있다는 상상적 해결(강제 교화)의 모순을 드러낸다.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 뫼르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의로만 행동하는 부조리한 인간이지만, 재판장에서 공동체는 자의와 상관없이 규율된 감정의 부재를 파헤치면서 뫼르소를 태생적 악으로 규정한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고, 범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없었으며, 데이트하는 여자친구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비정하고 잔인한 인간이라는 정의할 수 있는 근거가되지 못한다. 인간 공동체는 자유를 추구해 왔지만, 그 자유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공감받을 수 없는 ‘이방인’ 즉 부조리한 실존을 규명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오늘날 자유의 가장 큰 위기일 것이다. 자유로부터의 해방: 플레이의 신성한 규율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자유의 수행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시지프스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배타적 자의를 제어하고 자유를 수호하기 사회계약과 윤리,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강력한 외적 폭력인 법과 권력을 창안한다. 그러나 규율에 의한 질서의 테두리가 없다면 자유는 담보되지 않는 것일까? 오래전부터 자유주의자들이 자문하고 대답해 왔던 이 명제는 ‘자유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실낱같은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유와 규율이 동전의 양면이라면, 동전을 던지지 않음으로써 자의-자유-규율이라는 중간지대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중간지대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언제나 매력적인 이도공간으로 여겨졌다. 생리적 욕구나 마찬가지인 충동을 마음껏 행동으로 발산할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윤리에 반하지 않으며, 공리로 조직화된 공고한 사회질서를 깨트리지 않는다. 플레이(play)는 공동체가 시작된 이래 인간이 가장 정교하게 고안한 역사적·변증법적 해방의 규칙이다. 그러나 모든 플레이가 자의적 충동을 촉진하는 것은 아니다. 플레이에도 “공통의 즐거움”을 위한 강력한 공리 규칙이 적용되기 마련이다. 축구에 참여하는 플레이어가 너도 나도 손을 쓰기 시작한다면, 평등한 조건 하에 이뤄지는 순수한 경쟁이라는 고양감은 사라지고 만다. 헤겔이 자유 의지에서 가장 결정적인 계기로 정의했던 “타자 속에 머무르는 나 자신”의 응시는 굴절되어, 그 누구도 경기가 끝난 후 서로에게 악수를 청하지 않게 될 것이다. “게임의 규칙은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고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규칙은 불변한 진리이기 때문에 규칙을 위반하면 플레이의 세계는 붕괴한다. 놀이 파괴자는 놀이를 잘 못하거나 속이는 자보다 죄질이 더 무겁다” - 요한 하위징아 플레이의 사회 문화적 감각을 최초로 탐색했던 인류학자이자 <호모 루덴스>의 저자인 요한 하위징아는 질서와 자유의 문제가 합목적적으로 뒤엉키는 플레이 공간의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플레이는 참여자들로 하여금 일상적 법률과 규정으로부터 해방되어 공통의 경험을 제공하며, 자유로운 행위이자 자유 그 자체”이다. “실제 생활에서 벗어나 일시적 행위 영역으로 들어가, 아름다움과 숭고의 높이를 획득하여 플레이가 진지함이 되고 진지함이 플레이가 된다. 일상적 생활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플레이는 필요와 욕구의 충족이라는 명제 바깥에 있으며, 생활의 욕구 과정을 방해한다. 플레이는 인생을 장식하고 풍요롭게 하며, 그 표현력은 공동체적 이상을 충족시킨다.” 그리하여 플레이는 인류 사회에서 번식이나 생존과 같은 본능적 욕구만큼이나 중요해진다. 플레이는 일상의 규율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놀이의 질서’를 먼저 창조하고 스스로 하나의 질서가 된다. 플레이의 질서가 붕괴하는 순간 자유가 파괴되고 일상의 규제가 다시 시작된다는 불안감 때문에 플레이어는 규칙을 준수한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플레이어는 실제적 처벌 없이도(혹은 플레이 내에 벌칙을 마련함으로써) 스스로 질서를 수호하는 능동적 주체가 된다. 공동체의 문화가 플레이를 창조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플레이로부터 공동체 문화가 발생한다는 하위징아의 가정은, 예술과 스포츠가 플레이로부터 파생되어 나왔음을 논증할 뿐 아니라 ‘미적 숭고’라는 중요한 감성학적 가치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자유’ 즉 “자율(autonomy)”로부터 기원했음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질서와 결부된 놀이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경향을 띄고, 참여자와 구경꾼을 경이에 휩싸이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규율을 가르치는 가장 훌륭한 스승은 법이 아니라 플레이인 것이다. <스타크래프트>(1998)가 전무후무한 인기를 끌고, e스포츠의 영역까지 나아가는 등 사회적 현상이 된 이유는 ‘게임의 질서를 속이는’ 플레이가 그 어떤 게임보다도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입법된 질서를 기만하면서도 게임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참여자의 자유를 침해하지도 않는다. 질서의 부조리함으로부터의 아름다운 탈주는 IMF 이후 억압적인 신자유주의 현실을 부유하던 관중들에게 비밀스러운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반면에 처음부터 e스포츠를 전제로 하고 디자인되었던 <스타크래프트2>는 그다지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 게임을 기만할 수 있는 자유가 왜소화되어 게임의 매커닉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스타크래프트> 시리즈는 플레이가 삶의 조건이나 문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율(autonomy)이자 문화의 토대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제이다. 문화적 공통계로서의 활극 ‘활극(活劇)’의 사전적 의미는 싸움, 도망, 모험 따위를 주로 하여 연출한 영화나 연극이다. ‘활극’은 한편 액션 영화를 널리 지칭하는 용어로도 쓰이며, 구체적인 장르라기보다는 시공간적 개념에 더 가깝다. “한 편의 액션 활극”이란 말에는 크게 세 가지의 연상 작용이 뒤따른다. 서부극(또는 웨스턴), 무협, 역사물의 특정한 재연 방식(일본 전국시대의 사무라이 활극, 한국의 조선시대 모험물), 스페이스 오페라(우주 식민지 개척을 주로 다루는 SF의 하위 장르)가 그것이다. 활극은 액션 영화의 성격이 강한 시네마적 개념이지만, 장르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통틀어 무사가 등장하는 영웅담과 사랑 이야기는 가장 사랑받았던 서사이다. 멀리는 로망스 문학으로부터도 그 역사적 연속성을 찾을 수 있다. 중세 유럽의 기사 문학(아서 왕의 전설, 니벨룽겐의 노래), 중국 명나라 시대에 번창한 서유기와 삼국지연의는 동서양을 가로질러 광활한 대지에서 벌어지는 싸움, 모험, 정의, 사랑이라는 공시적 감각을 향유한다. 삼국지연의의 영문 제목이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인 이유이기도 하다. 활극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묘한 기시감, ‘모험이 가능한 무정부주의적이며 상상적인 공통계’의 정체는 플레이의 확장된 형태로서 인류라는 종 규모의 감각에 아로새겨져 있다. 활극 속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할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의 억압적인 규율과 약속들로부터 벗어나, 광활한 벌판을 위를 달리며 ‘진정한 나’가 추구하는 무한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내키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구속받지 않으며 활극은 우리가 본원적으로 내재한 자유의지를 자극해 운명과 반대되는 길로 나아가라 이야기한다. 오늘날의 장르에서 여전히 배회하는 활극의 유령은 ‘문제적 인간’의 서사였던 근대 문학의 시대를 넘어서, 인류가 새롭게 자아낸 자본주의-소비사회의 역장을 깨고 탈주하고자 하는 래디컬한 의지가 잠재해 있음을 시사한다. 문화적 공통계(cultural commons)로 전유되는 활극의 양상들. 서부극을 제국주의적 팽창 서사의 이데올로기 형태로 단순히 규정하기란 쉽다. 그러나 ‘서부극’이라는 재현양식을 뒤집어쓰고 출몰하는 ‘활극’의 문화적 공통계를 들여다본다면 거대한 자유의지의 뿌리가 심연에 얽혀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케이 목장의 결투>(1957, 좌 상), <화염>(1975, 우 상), <검은호랑이의 눈물>(2001, 좌 하),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2008, 우 하)은 ‘스스로 입법자 되기가 가능한 공간’인 서부가 각각의 지정학적 미학에서 번역되는 양태들이다. 반세기에 달하는 장르의 형성 시기에 웨스턴은 지구촌 활극의 가장 떠들썩한 시네마 소재였다. 만주 웨스턴, 커리 웨스턴, 스파게티 웨스턴, 태국 웨스턴, 카우보이모자와 리볼버 권총만 주어진다면 활극은 어디서든 펼쳐진다. 활극은 제국/식민지, 중심부/반주변부, 동양/서양, 북반구/남반구, 유럽/북미를 가로지르며 민족국가와 인종이라는 촘촘한 그물망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또한 활극은 공공의 이익을 빌미로 하여 숨 막히게 건설된 현실의 법과 질서를 기만할 뿐만 아니라, 플레이의 본질이 그러하듯 새로이 모험과 스릴이라는 조례를 입법한다. 서부극이 백인 남성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재현이나 단순한 문법 또는 맥거핀이 아닌, ‘플레이’의 가장 원초적인 반영 형태이자 ‘문화적 공통계(cultural commons)’로서 활극에 접근해야 하는 이유이다. 세대를 넘나들며 익숙하게 경험한 것처럼, 인류 서사의 공통 자산인 활극에는 현실의 제약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서부’는 공권력이 닿지 않으며, 협잡과 음모 그리고 폭력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적자생존의 장이지만 동시에 마음 내키는 대로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말 한 필에 혈혈단신 달려간 이 광활한 평야에는 자본가와 노동 계급의 관계도, 국가와 시민의 관계도, 가족과 마을의 관계도 힘을 쓰지 못한다. 활극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청중이나 독자가 아닌 ‘플레이어’의 마음가짐으로 자유의 날개를 펼친다. 그러나, 활극이라는 나라의 지평선에는 약육강식이나 권모술수 너머의 그 무엇인가가 있다. 강제하는 법도 신고하면 달려오는 경찰도 없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는 것이다. 인지상정, 역지사지, 사필귀정, 권선징악, 이른바 신의라고 불리는 것들이 이 이상한 나라를 자유롭게 유지하는 성문법이다. 한국과 중국의 열렬한 장르문학 독자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강호의 도리’는 그러한 가치들을 잘 반영한다. 강호(江戶)라는 공간의 다양한 변주들. 김용의 소설 <영웅문> 3부작은 중국 근대문학에서 단절된 활극을 복원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전체주의 국가 권력을 무효화하는 상상적 공간, ‘강호’를 창안함으로써 세계보다 더 큰 지도 그리기를 시도한다. 공인 판매 부수 1억 부 이상, 한국에서만 8백만 부 이상이 팔린 김용의 작품들은 활극을 매개로 영웅 서사를 민중사의 판타지와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서구의 장르 판타지와 대칭을 이룬다. 나아가 문화적 공통계로서 강호라는 세계관은 활극에서 그치지 않고, 근대의 개인적 욕망들이 굴절하고 좌절하는 지점들을 제공함으로써 미학적 출구전략을 제시한다. <동방불패>(1992, 우 상)는 김용의 원작 <소오강호>의 주제의식 “강호의 속박을 벗어버리다”를 재해석한다. <와호장룡>(2000, 우 하)과 <일대종사>(2013, 좌 하)는 시네마의 심미주의를 무협이라는 문법에 담았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전자가 기술적 재현에 역량을 집중하는 반면 후자는 중국이라는 근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얻어진 역사적 자상을 자기고백적 연대기로 어루만진다. 요컨대 활극은 공동체 속 인간이 가장 날것으로 소유하고 있는 생리적 충동이 자유라는 자장 안에서 플레이될 수 있는 무정부주의적 약속이자, 문화적 공통계로서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쉽사리 전유할 수 있는 ‘자율’의 시공간적 토양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활극은 장르의 형식들을 다각적으로 접경화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시네마로 확장된 활극 경험은 스펙터클을 소망 충족 욕구를 해소하는 배관이 아니라 자유의 쾌를 배양하는 화수분으로서 장르가 작동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시네마에서 플레이의 완전한 ‘자율’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참여자들이 플레이어가 아닌 청중으로 남아있는 한, 자유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직접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그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면의 목소리가 어떤 충동을 자극하는지 완전히 인식하지 못한다. 나아가 우리가 플레이의 자유를 스스로 입법할 수 없다면, 스스로를 규제하고 해방하는 ‘자율’또한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자유를 향한 모험, 플레이의 코드적 귀환 플레이의 기계화된 형식이라는 점에서 디지털 게임은 활극이 가장 활극답게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담지하고 있다. 디지털 게임은 플레이가 상업화되는 소비사회 이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역사적 경험을 정통적으로 계승했다. 최초의 게임인 <테니스 포 투>(1958)와 <스페이스 워!>(1962)가 미국의 반전 평화운동· 캘리포니아 자유주의· 반자본주의 좌파 진영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플레이의 현실 해체적 자유 경험이 기술 디자인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게임들은 단순히 뿅뿅 거리는 일회성 유흥이나 기술적 경이가 아니었다. 두 게임의 발명자인 윌리엄 히긴보덤과 스티브 러셀 모두 “공유하고, 연결한다”는 사회 공동체적 가치에 충실했기에 디지털 게임의 테크놀로지는 공통의 테크놀로지가 될 수 있었다. 자유를 숭상하는 미국의 기술 긱(gig)들, 테크노 히피들은 디지털 게임의 소스코드가 공유재로 확산되는 프로세스를 교훈 삼아 해커 행동주의의 교리를 만들고,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스스로 게임 내 규칙의 입법자가 되거나, 혹은 선고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게임은 문화 이전의 지력(地力)을 생성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한편으로는 활극의 구경꾼에서 활극의 참여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디지털 게임에서 이를 찾아 헤맨다. 사이버스페이스의 공간적 제약은 무의미하다. 플레이의 물리적 한계(놀이터, 운동장, 스크린, 법정)는 뚜렷하지만, 디지털 게임에서는 반도체 프로세서의 제약만이 유일한 걸림돌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산적 한계들이 디지털에서는 해빙된다. 디지털 게임 플레이에는 더 복잡하고 덜 추상적인 규칙들이 적용되며, 대면 없이 타인과 접촉하거나 혼자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특징 때문에 대화주의적 성격이 아닌 독백적 성격을 띠게 된다. MMORPG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오늘날 한계에 봉착했지만, 거대한 다중 플레이의 장을 열어젖힌 새로운 활극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말 그대로 엄청난 기술 혁명이었다. 최대 수천 명이 동시에 한 공간에서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동시성의 감각, 동일하고 균등하게 적용되는 광범위한 플레이 규칙, 무엇보다도 이 활극 공간이 오늘도 내일도 언제 어디서나 계속되고 있으며, 언제든 접속할 수 있다는 감각… 편재성(ubiquitous)이야말로 가장 큰 변화였다. 하위징아가 플레이에서 목격했던 일시적이고 제의적인 성격이, 어디에나 존재하고 언제나 참여할 수 있는 전시적 성격으로 전화한 것이다. 90년대 PC 통신 시대, 다중 접속 던전 게임(MUD)과 다중 접속 게임(MUG)의 모습 <단군의 땅>(1994, 좌)에서 보여지듯 MUD는 텍스트를 통해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며, 아스키코드로 GUI가 구성되었다. GUI가 발달하고 텔레커뮤니케이션의 규모가 방대해지면서, 오늘날의 MMO의 초기 형태인 MUG, <메리디안 59>(1995)와 같은 게임이 등장하기도 했다. 초연결 사회 도래기 사회문화적 풍경들. 플레이가 디지털 게임의 옷을 입고 활극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데에는 플레이(play)에 대한 공동체 전체의 감각 변화도 큰 영향을 미쳤다. PC 통신, 월드와이드웹, P2P 등 “대안 세계로서의 사이버스페이스 상상” 이야말로 활극 참여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자유의 자산이었다. 세계가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 불가능이 없어 보이는 기술의 진보, 연결된 인간과 새로운 연대에 대한 낙관주의는 자유를 향한 모험에 뜨거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게임의 기술이 내재한 본질이 기술적 공통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활극이 가진 문화적 공통계의 속성은 이와 쉽사리 조응할 수 있었다. MMO가 대규모 다중의 동원과 연결을 통해 동시성의 감각을 구축했다면, 초기 게임 개발자들로부터 이어져 온 오픈소스의 유서깊은 전통은 플레이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게임이 저작권, 영업 비밀과 같은 경계 안에서만 머물게 된다면 진정 활극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캘리포니아 자유주의와 해커 행동주의의 정신을 계승한 서구의 엔지니어들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게임에 새겨진 노동의 흔적들,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피와 불의 문자들”을 대중에 공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플레이의 본능은 연결과 공유, 그리고 연대가 아니었던가? 사람들을 플레이로 이끌고, 즐거운 자유를 향유하게끔 하는 디지털 게임에는 자동차나 가전제품과 마찬가지로 고도 기술 집약적 노동이 들어가 있다. 코드 리터러시에 능숙한 사람들은 즉시 공유된 ‘피와 불의 코드들’을 재 주조할 수 있었다. 디지털 게임에서 플레이는 문화적-기술적 공통계를 동시에 획득할 잠재태를 가진다. 문화적으로 기존의 활극이 가지고 있는 문법들을 재매개하거나(좌), 기술적으로는 플레이어 스스로 소스를 뜯어고치고, 법을 제정하게끔 자율(autonomy)을 고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레드 데드 리뎀션>(좌 상) 시리즈는 기존의 할리우드 서부극이 펼쳐놓은 활극 요소들을 디지털 게임의 상호작용성과 접합하여 독특하게 연출, 게이밍 시네마(gaming cinema)라는 새로운 미적 숭고의 순간을 창출했다. 반면, 모딩(modding)을 통해 공유 전략을 추구하는 게임들은 플레이어에게 기술을 공개하고 그것을 가지고 놀게 만듦으로써 자율의 세계를 극대화한다. 플레이어는 이제 게임의 법칙을 따르고 숭상하는 시민이 아니라, 재현을 수정하고 세계를 재창조하는 조물주가 되는 것이다: <엘더스크롤>(우 상) 시리즈는 게임의 본판을 즐기기보다 설계도에 개입하기를 더욱 즐기는 게임이 되었다. 한편, 집합 지성의 공동 창조와 플레이 결과 게임의 법칙이 새로 만들어지고, 이를 공동체가 보편적으로 즐기게 되는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데이Z> 시리즈는 군사 시뮬레이션 게임 <A,R,M.A>의 소스코드를 새롭게 고안하여 만들어진 오픈월드 서바이벌 게임이다. AOS나 배틀로얄과 같이 사람들이 널리 즐기는 게임의 매커닉은 이처럼 이타적으로 열린 기술적 공통계로부터 기인한다, 디지털의 시대에도 하위징아가 <호모 루덴스>에서 보았던 플레이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플레이는 무언가를 위한(for) 것일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와 함께(with) 혹은 무언가의 속(in)에서 수행된다.” 활극의 몰락 시대, 자유를 어떻게 재발명할 것인가 디지털과 인터넷의 부흥기, 플레이는 문화적·기술적 공통계를 아우르며 짧은 전성기를 맞았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모험으로 가득 찬 사이버스페이스에 열광했던 시기, 사람들에게는 온정과 열정이 가득했다. PC 통신 광장에서, 프리챌이나 싸이월드와 같은 장소에서, 홈페이지 채팅방이나 온라인 게임에서 환대와 관용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풍요가 물질적 부가 아닌 문화적 부로 여겨지던 시기, 우리 모두 모니터 저편에서 따뜻한 인사를 건넬 누군가를 기다렸고 또 설레였다. 기억하는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누군가 달아줄 댓글을 기다리던 마음을, 개인홈피의 채팅방에 들어갔을 때의 상냥함과 환대 인사를. 그러나 세계 대부분의 장소에서 자유는 쇠퇴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처럼 사심 없이 뭔가 플레이하고, 모험에 두근거리던 해방과 연대의 순간들을 잃어가는 중이다. 어느 때부턴가 거리에는 예전에 들었던 음악의 리메이크 버전만이 반복해서 들려오고, 시네마는 역사의 뒤안길로 후퇴하고 있으며, 디지털 게임 플레이는 노동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자의’는 그 어느 때보다 만연하고, "~을 향한 자유"가 아닌 "~로부터의 자유"만이 용광로처럼 들끓는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처럼, “제약이라는 의미를 지닌 모든 내용으로부터의 도피”, 즉 “공허함의 자유”가 그 자리를 지배한다. 공정성이 무너진 지 오래, 출발점이 대물림되는 사회에서 플레이는 그 본질인 “페어플레이”를 상실하거나 고도로 계급화되며, 플레이의 질적 측면들이 돈으로 좌지우지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자유라는 무거운 부담을 피해 손쉽게 복종과 의존으로 돌아가는 시대”라는 프롬의 지적은 오늘날 플레이에서도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시네마에서 숭고를 찾아보기 란 더욱 어려워졌고, 디지털 게임에서는 더 이상 모험으로 가슴이 뛰거나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한다. 플레이를 어떻게 재발명할 것인가? 이는 곧 자유를 어떻게 재발명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직접 연결된다. 공통계를 더욱 확대하고 집단지성과의 협력을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천편일률적인 공산품을 대량 생산할 것인가? 불행히도 최근 몇 년간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게임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자유에서 자율로, 나아가 아우토노미아(autonomia)로 앞서나가기 위한 철학적 프로그램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시지프스 신화>는 “나는 나의 자유를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불행하다.”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니체의 말처럼, “극복되어야 할 저항에 의해, 위쪽에 존재하기 위해 치르는 노력에 의해 측정될 수밖에 없다.” “놀지 않고 일만 하는 잭은 바보가 된다.” - <샤이닝> 中 신현우 문화연구학자로, 기술-정보문화와 영상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공저로 <사물에 수작부리기>, <게임의 이론> 등이 있으며 예술과 테크놀로지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20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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