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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3 변하거나 변하지 않거나, 모두 옳다 - 주먹왕 랄프 시리즈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3 변하거나 변하지 않거나, 모두 옳다 – <주먹왕 랄프> 시리즈

영화와 만화, 드라마와 장르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 속에서 게임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알아보며 게임과 대중문화의 접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강상준 님이 들려주는 ‘대중문화 속 게임 읽기’. 그 세 번째 편에서는 하나의 시리즈에 상반된 의미를 담아낸 애니메이션 영화 <주먹왕 랄프>를 다뤄보겠습니다. 2012년 <주먹왕 랄프>가 개봉했을 때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든 게 ‘전복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락실 문이 닫히면 게임 캐릭터들은 우리와 다름없이 각자의 자리를 떠나 진짜 하루를 만끽한다. 이들에게 게임은 주어진 일과였기에 이제부터 본격적인 ‘방과 후 활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각 게임의 캐릭터들은 중앙 터미널에 모이기도 하고, 다른 게임에 놀러 가기도 하는가 하면, 게임의 벽을 넘어 여러 캐릭터들과 허울 없이 어울리기도 한다. 익히 알고 있는 캐릭터들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나쁜 놈(bad guy)’ 역을 30년 동안이나 맡고 있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 주인공 랄프의 말을 경청하는 이들은 잔기예프나 쿠파, 닥터 에그맨 등등이다. 게다가 우습게도 이들의 모임은 알코올중독자 모임인 AA(Alcoholics Anonymous)를 연상시킨다. “난 나쁜 놈이지만 그래도 괜찮아. 착한 놈이 될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아. 난 이런 내가 참 좋아.”라는 구호로 모임을 파하는 도입부부터 <주먹왕 랄프>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곳에 피어 올린 상상력으로 그렇게 시종일관 관객을 쥐락펴락했다. 디즈니(Disney)가 가상의 게임 캐릭터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어쩌면 픽사(Pixar)가 장난감에 생명을 부여한 것에 견줄 수 있을 만한 단순한 아이디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후 비슷한 설정의 작품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걸 보면 당시만 해도 무척 참신한 아이디어였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마저도 뒤엎는 전복적인 설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랄프는 <다고쳐 펠릭스>라는 게임에서 난동을 피우고 건물을 부숴 게임의 히어로인 펠릭스가 마법 망치로 건물을 수리하도록 만들어주는 악역 캐릭터다. 랄프에게는 당연한 일과지만 어쩐지 돌아오는 것은 빌딩 주민들의 일상적인 괄시와 따돌림뿐이다. 게임의 마지막, 늘 주민들에 의해 옥상에서 내던져져 진흙탕에 처박히는 그런 ‘일상’ 말이다. 쓰레기장에서 홀로 벽돌 이불을 덮고 하루를 마감하려니 어쩐지 속이 쓰리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법하다. 그리고는 게임이 출시된 지 30년째 되는 날 랄프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도 ‘착한 놈’이 되고 싶다고. 펠릭스처럼 반짝이는 메달을 따고 싶고, 영웅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러지 말란 법이 있던가? 물론 있다. 모든 것은 ‘프로그램된 대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게임 세계의 절대적인 법도로, 모든 게임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이를 경고하고 그의 도발적인 생각에 경악한다. 그건 과거 ‘터보’나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이후 랄프의 모험은 여러 게임을 오가면서 게임을 무대 삼은 것이 여러 질감의 배경을 한 작품에 담아내기 위한 또 하나의 포석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랄프는 최신식 FPS 게임인 <히어로즈 듀티>에 몰래 들어가 엉망진창으로 플레이어의 전투를 망쳐놓더니 이내 억지로 메달을 따 소원을 이룬다. 그리고 과자와 사탕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벌이는 소녀들의 레이싱 게임 <슈가 러쉬>에 휘말려 이곳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따돌림당하는 소녀 바넬로피를 만난다. 랄프는 메달을 두고 바넬로피와 티격태격하던 사이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결국 물심양면으로 바넬로피를 도와 우여곡절 끝에 그의 첫 번째 레이스를 성사시킨다. 결국 랄프는, 우연찮게 <히어로즈 듀티>에서 <슈가 러쉬>의 세계로 넘어온 ‘사이버그’가 창궐한 클라이맥스에서 이 모두를 해결하고 악의 원흉이던 킹 캔디의 음모마저 막아낸 다음 영웅으로서 <다고쳐 펠릭스>에 복귀한다. 물론 그럼에도 랄프는 여전히 ‘나쁜 놈’이다. 하지만 여기 다다르기 위해 참으로 많은 오해와 편견의 산을 넘어야 했던 탓인지 이제 그는 주민들에게 옥상에서 내던져질 때가 가장 행복하다 말한다. 여기에 바넬로피라는 절친도 생겼다. 게다가 <다고쳐 펠릭스>는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각광받는 중이란다. 모든 게 원래대로, 아니 프로그램된 대로 돌아왔다. 올해 초 개봉한 <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이하 <주먹왕 랄프 2>)를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마냥 전복적인 작품이라고, 어떤 면에선 별로 디즈니스럽지 않다고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6년 만의 공백을 깨고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속편은, 예상외로 전편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뒤엎는다. 오락실 안 세상이 얼마나 작은지, 반면 인터넷 세계는 얼마나 무한한지를 일깨우기 시작해, 온갖 인터넷의 편리와 해악, 그 작용과 반작용을 유쾌하게 풍자한다. 그중에서도 디즈니의 역대 공주들이 등장한 장면은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이들이 물을 바라보며 꿈을 읊으면(그 물이란 바다나 우물, 때론 물웅덩이 등으로, 뮬란의 경우엔 마구간 여물통이었다고..)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며 음악이 흐르고 노래가 절로 나온다. 공주라는 증거 또한 뻔했다. 엄마가 없는 공주만 해도 대여섯이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는 기본이다.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도움을 줄 남자가 있는지 여부란다. 그리고 마침내 바넬로피를 본떠 티셔츠로 갈아입은 공주님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이렇게 편할 수가, 이것은 혁명이라고. 심지어 자신이 속한 게임을 마냥 긍정하지도 않는다. 날마다 같은 레이스를 반복하던 바넬로피는 어느새 <슈가 러쉬>의 일상이 지겨워졌다. 새 트랙이 추가된 것도 벌써 오래전으로 더 이상의 업데이트는 요원해 보인다. 사실 인터넷에 발 담그게 된 계기도 전 세계에 딱 하나 남은 <슈가 러쉬> 게임기의 핸들을 이베이에서 구매하기 위해 온 것이니 말 다했다. 그런 바넬로피에게 단순한 수단이던 인터넷은 새로운 자극이 되기 충분했다. 특히 암울한 도시를 무대로 한 레이싱 게임 <슬로터 레이스>는 바넬로피가 바라 마지않던 ‘새로운 세계’가 되기 충분했다. 뒤에선 불길이 치솟고 약탈과 폭력의 그림자가 여럿 스쳐가지만, 쇼핑카트를 타고 어둡고 불온한 거리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공주’ 바넬로피에겐 이제야 스포트라이트가 비치고 노랫말이 흘러나온다. 어디로 가는지 정해져 있지도 않고 날마다 다른 경주를 벌일 수 있는 곳, 심지어 인간 플레이어와 경쟁하고 그를 죽여도 개의치 않는 높은 자유도의 게임. 바로 이곳이 바넬로피가 바라마지 않던 세상이었던 것이다. 반면, 1편에선 모든 게 제자리를 찾는 게 중요했다. 랄프가 없는 <다고쳐 펠릭스>는 펠릭스가 고칠 게 없는 한 고장 난 게임일 뿐이다. 엉뚱하게 랄프가 침투한 다른 세계 역시 엉망이었던 것은 매한가지다. <슈가 러쉬>의 왕으로 군림했던 킹 캔디는 프로그램을 자의적으로 바꿔 자신만의 세계를 억지로 구축했을 뿐이고, 그의 정체는 자신이 속한 레이싱 게임이 진부해지자 다른 게임에 침투하다 제거당했다고 알려진 이 세계의 진짜 악당 터보였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오류(glitch)라 비난받으며 무조건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한 바넬로피였으며, 게임의 존폐라는 대의를 앞세워 바넬로피를 서슴없이 고립하고 학대한 전체주의 세계는 결국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치 원상태로 돌아가는 듯 보인다. <히어로즈 듀티>의 지휘관 NPC 칼훈 병장은 결혼식 당일 신랑이 사이버그에게 죽임을 당해 그로 인한 막대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데(어차피 이 역시 프로그램된 데 불과하지만), 이 트라우마는 펠릭스와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으로 극복된다, 굳이. 그렇게 모든 것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야 만다. 바넬로피 역시 게임기 옆면에 자신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 만큼 본디부터 이 게임의 주인공이었을 따름이다. 심지어 디즈니는 여기서 그치는 법이 없다. 짜잔, 바넬로피는 원래 이곳의 공주였으니까. 이렇듯 1편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다. 마찬가지로 고전 게임이 사랑받는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다. 있어야 할 곳에 죽 머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 물론 <다고쳐 펠릭스>의 경우엔 다른 게임에서 버려진 캐릭터들을 등용해 재활용한 탓도 있어 보이지만, 결국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프로그램된 대로 따르는 것만이 1편의 완벽한 결말처럼 보인다. 그러니 단 일주일 만에 벌레들과 싸우는 것이 질려버렸다며 게임 <태퍼>의 바에서 울먹이는 <히어로즈 듀티>의 군인 캐릭터 따위는 용납될 수 없다. 어쩌면 그야말로 랄프의 그릇된 욕망에 틈을 내준 결정적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은 소동극의 기본 얼개다. 게다가 레트로 게임에까지 힘을 싣기 위한 1편의 결론에 이보다 더 적절한 방식은 찾기 힘들어 보인다. 그러니 2편에서 바넬로피가 결국 <슬로터 레이스>로 ‘이적’하기로 결심한 것은 1편 이상의 파격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자기가 태어난 세계를 지키기 위해, 그곳의 일원이 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오던 바넬로피는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새로운 게임에 몸담는다. 날마다 새로운 레이스가 펼쳐지는 그곳에. 지난 6년간 게임이 끝나면 늘 함께 놀았던 절친 랄프를 떠나는 것이 발목을 잡고, 랄프 역시 바넬로피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한때 인터넷 세상을 큰 혼란에 빠뜨리기까지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이제 가만히 제자리에서 일상에 감사하며 사는 것은 지루한 일이며 심지어 도태되는 지름길이 되어버렸으니까. 반면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슬로터 레이스>의 업그레이드 시점인 두 달 후에 만나기로 약속하는 랄프와 바넬로피의 기약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넬로피가 선택한 <슬로터 레이스>는 당분간은 계속 새로워질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깜짝 등장에 이어 고전 게임과 진짜 전쟁을 방불케 하는 미래형 액션 슈팅 게임, 과자 세계의 레이싱 게임 등을 오가던 <주먹왕 랄프>에 비해 속편인 <주먹왕 랄프 2>는 참신함보다는 앞서 구축한 장벽을 무너뜨리려는 야심에 더욱 무게를 실은 듯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예상치 못한 결말이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말은 너무나도 당연해 결국엔 진부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랄프와 바넬로피의 모험보다는 고뇌에 많은 힘을 실은 것 역시도 둘의 이별을 납득시키기 위한 성실한, 너무도 성실한 수순으로 보이는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다. 이렇듯 자리를 지키라는 파격, 자리를 벗어나라는 진부함이 아이러니하게 맞물린 <주먹왕 랄프> 시리즈는 게임의 현재마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도트로 구성된 고전 게임과 날로 달로 진화하는 최신형 게임이 함께 각광받는 우리 시대의 면면과 묘하게 닮아 대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의 신작을 통해 새삼 되새긴 전작에 새로운 층위가 실린 것 역시도 꼭 닮았다. 시간이 지난 후엔 또 어떤 시대에 서서 어떤 눈으로 이 시리즈를 바라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DVD2.0》《FILM2.0》《iMBC》《BRUT》 등의 매체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영화, 만화, 장르소설, 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 살았다. 『위대한 망가』『빨간 맛 B컬처』 시리즈 등을 썼다.

201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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