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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과 장르미학#3 포스트휴먼과 SF 활유법: 디스토피아, 테크노 - 자본주의, 미래고고학
세계관과 장르미학

세계관과 장르미학#3 포스트휴먼과 SF 활유법: 디스토피아, 테크노 – 자본주의, 미래고고학

세계관은 게임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유저들은 게임 속에 만들어진 가상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 하며 게임을 즐깁니다. ‘세계관과 장르미학’은 이 세계관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역사적으로 무수히 축적된 게임 속 세계관을 장르별로 나눠서 살펴볼 것입니다 세 번째 편에서는 포스트휴먼의 등장과 함께 SF 세계관에 담긴 디스토피아와 자본주의, 미래고고학적 통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기술적 마법의 일상화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는 아서 클라크의 유명한 관용구가 좀처럼 체감이 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의 과학 기술 발전은 경이가 아니라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화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았던 바벨탑은 이미 시카고와 두바이, 서울에도 건설된 지 오래다. 넓은 의미에서 오늘날 인류 대부분은 사이보그이다. ‘신체화된 기계’란 터미네이터의 기계 골격이나 공각기동대의 전자두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인공두뇌는 각종 스마트 디바이스와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 구글의 페이지랭크 검색 알고리즘이나 유튜브의 관련 영상, 페이스북의 광고, 아마존의 상품 추천 시스템 등은 모두 집합적 다중의 빅데이터 연산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인공두뇌이다. 우리는 이동할 때에나 식사를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연인과 데이트를 할 때나 이것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기술들에 의해 이미 기계적 사고로 재구조화되는 단계로 나아가는 중이다. 인공 장기, 각종 보정물을 장착한 사람들은 유기체의 한계를 극복한 지 오래이며 사이버-오가니즘과 사이버-피직스는 산업 영역에서나 생활세계에서나 일상화되었다. 단지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우리가 그것이 경이로운 기술 진보의 실재임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전화와 삐삐를 사용하던 인류는 불과 이십여 년 만에 스마트폰, 무선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그것들이 마법이라고 생각한 시간은 잠시에 불과했다. 인터넷의 집합 지성은 하이브마인드를 구축했고, 오픈소스 기술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기술적 마법에 참여하고 있다. 리눅스와 위키피디아는 초기 결과물에 불과하다. 무인 자동차에 누워 게임을 하거나 근사한 식사를 하며 목적지까지 가는 상상은 생각만 해도 설레지만, 그런 설렘은 상용화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한 루틴이 되고 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자란 잠을 보충하거나 노예처럼 잔업을 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운전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설적으로 창밖의 흘러가는 풍경을 더 이상 응시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개념을 넘어서: 비인간 행위자 주체의 재발견 충분히 발달된 과학기술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확장할 뿐 아니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인공물(artifact)을 사이버네틱스로 매개하고, 유기체나 생태계처럼 순환하도록 만든다. 바위, 나무, 생물들과 달리 이 인공물들은 인간과 동등한 하나의 비인간 행위자(non-human actant)로 활동하며, 인간의 기술적 발명과 개입은 이 제2의 자연을 유지보수하고 진화시키는 과정의 일부로 작용할 뿐이다. 이미, 사이버 기술 환경은 인간의 고유한 신체, 독창적 사고라는 개념을 동기화시키고 있으며 이 속에서 ‘인간’ 과 ‘생물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SF 속 기술적 상상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경우는 생각보다 적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제5원소> 속 비행 자동차가 현실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소음과 민원 때문이다. <터미네이터>의 킬러 로봇은 이미 전장을 활보하고 있다. 단지 그것이 이족 보행 인간형이 아닐 뿐이다. GNR 혁명(Genetics, Nano Technology, Robotics)은 미래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출처: 핀터레스트, <터미네이터 2:오리지널>(1991) 공식 스틸컷) 저명한 포스트휴먼 사상가인 캐서린 헤일스(N. Katherine Harles)는 이러한 오늘날의 탈신체적-탈마법적 과학기술 국면이 이미 앨런 튜링(Alan Turing)의 유명한 실험에서 이어져 온 하나의 전환기라고 설명한다. 데카르트적 인식론의 질문이었던 “누가 생각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생각할 수 있는가”가 오늘날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이러한 사고 전환을 통해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 경계 넘어서기는 단순히 무기체와 유기체의 범주를 재설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컴퓨터 언어를 전유하고 그것처럼 사고할 뿐만 아니라, 거꾸로 사이버네틱스에 의해 신체와 인식능력이 변하고 있다. 헤일스에 따르면, 고도로 전자화되고 초연결화된 기술환경에서 인간의 언어(수행언어)와 기계의 언어(실행언어)는 뒤섞이며, 규정된 신체(실재의 유기체적 몸)와 표상된 신체(사이버네틱스로 작동시킨 신체)는 끊임없이 접합된다. 반도체와 광케이블을 타고 흐르는 코드의 세계가 이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즉 로봇이나 기계와 같은 인공물은 인간의 손에 빚어졌으나 그것들은 지배나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협상’의 대상이며, 인간과 동등한 주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하나의 상상임이 드러나고 있다. 요컨대 인간 주체 개념과 범주가 달라졌다. 유튜브에서 추천 동영상을 따라가며 느끼는 감각은 나의 것인가, 아니면 기계의 것인가? <오버워치> 속 게임 캐릭터들을 조작하고 있을 때, 당신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페이스북의 상품 광고에서 기시감을 느낄 때, 이 욕구는 나의 신체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인터넷 속을 흐르는 집합의식에서 후험적으로 발생한 것인가?  <공각기동대>(1995)(좌)와 <데이어스 엑스>(2000)(우) (출처: 핀터레스트, 팬덤닷컴) <공각기동대>(1995)와 <데이어스 엑스>(2000)가 주인공/플레이어에게 제안하는 ‘융합’은 광범위한 존재론적 초월을 의미한다. 기존의 인간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남성/여성, 인간/기계, 개인/집합체, 개체/가분체라는 양립 가능한 변증법적 존재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쿠사나기 모토코(공각기동대)와 J.C. 덴튼(데이어스 엑스)는 코기토이면서 집합 지성이자, 남성과 여성을 초월한 사이보그,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으며 나눌 수 없는 개체인 개인(individual)이 아닌, 데이터 단위로 쪼개질 수도 있는 가분체(dividual)의 집합형태가 된다. 단, J.C. 덴튼은 플레이어에게 여전히 개인이자 휴머노이드라는 존재로 남을 수 있는 선택지도 제시한다. 규정된 신체와 표상된 신체가 서로에게 강림하는 이 순간들은 사이버펑크 세계관의 단단한 포스트휴먼 알레고리를 구축했고, ‘비인간 행위자 주체’가 인간 행위자의 영토 안에서 어우러질 수 있는 미래 고고학적 지평을 마련했다. 포스트휴먼, 인간 존재로부터의 탈주 <블레이드 러너>(1982), <바이센테니얼 맨>(2000), <프로메테우스>(2012),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2018). 전통적으로 SF에서 로봇, 휴머노이드, 레플리컨트 등은 비인간 행위자인 동시에 인간으로 인준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그려지거나 인간의 조건을 재성찰하는 계기가 된다.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라는 타이렐 사의 모토는 블레이드러너 뿐만 아니라 SF의 기원에서부터 현재까지 인간 사회가 공유하던 인간 개념에 대한 실천적 이념이다. 그러나,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는 새로운 질문이 등장한다: 게임 속에서 재현된 ‘휴머노이드’의 본질은 인간인가, 아니면 비트로 된 알고리즘 작동인가? 규정된 신체는 게임을 조작하고 있는 ‘나’의 신체인가, 아니면 모션 캡쳐를 한 배우의 신체인가? 표상된 신체는 나인가 배우인가, 아니면 게임 속 캐릭터인가? 소설과 영화에서 재현/실재의 이원적 세계는 텍스트로 작동하지만, 세계라는 서사시로부터 게임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플레이어는 실재와 재현이 거의 구분되지 않는 마법 탓에 역설적으로 다차원적인 신체들을 경험하게 된다. (출처: 핀터레스트, 팬덤닷컴, <프로메테우스>(2012) 공식 스틸컷, ILLUMINAT3D 유튜브 채널) 오래 전부터 SF 세계는 이러한 질문들에 냉철히 문답하고 있었다. 로봇, 인공지능, 사이보그, 초능력, 우주식민지, 초공간도약, 시간여행 등의 기술들은 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쏟아지는 장르산업의 홍수 속에서 ‘스펙타클’로 소비되어 왔다. 전후의 고도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어느 시대보다도 흥청망청한 소비사회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기술적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마법 같은 테크노 황홀경을 열어젖혔다. 냉전시기 열강들의 우주 개발 경쟁 하, 대중과학이 뿌리를 내리고 기술의 은밀한 제의적 성격이 하나씩 베일을 벗어 모습을 드러냈다. 서부 개척시대의 활극은 우주로 옮겨가고, 사람들은 고된 노동을 어떻게 ‘로봇’이라는 창조물에 떠맡길지 온갖 잔꾀를 내었으며, 한켠에서는 유토피아 과학이 어떻게 프랑켄슈타인 과학으로 전락해 왔는지를 역설했다. 본 연재 1회에서 다룬 것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성의 광기가 불러일으킨 지구 규모 제국주의 전쟁과 대량학살, 노동착취에 지긋지긋함을 느끼고 있었다. 경이는 스펙타클로 변모하고, 스펙타클은 곧 대량 생산되는 상품이 되었다. 쏟아지는 상품들의 유해에 파묻힌 지적•과학기술적 성찰은 현실과 연결시키기 어려운 과거의 유적이 된다. 디스토피아의 미래고고학 고고학이란 지층 속에 오랜 시간 묻혀있던 물질의 흔적을 발굴해내어 과거의 역사•사회•자연을 비선형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미래고고학’은 SF만의 고유한 권능이다. 따라서 SF속 과학 기술적 상상은 미래를 경유하여 현재로 돌아오게끔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SF의 세계를 응시하는 사람들은 역사라는 순환 열차를 기다리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먼 생각에 잠긴 승객들이다. 지층은 인류 공동체가 공통적으로 감각하고 상상하는 인공 행성이 되고, 이 낯선 대지에 내린 고고학자는 지도도 없이 더듬거리며 금속 표면 위를 어린아이처럼 기어간다. 작은 궤도 위성의 희미한 신호에만 의존한 채, 그는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과거의 화석들을 수집해 나가며 앞으로 지나갈 발자취들을 파내 기록하는 역사가가 된다. 그런데 이 고고학자가 파내는 역사적 유물들은 언제나 징후적이다. 파편들을 짜 맞춰 재구성한 시간 속에서 그는 거의 대부분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자세를 취하며, 염세적인 시각으로 세계상을 기록한다. ‘악이 충만할수록 드라마는 커진다’는 전통적인 시학의 법칙을 고려한다 해도, SF의 세계관은 절망적이고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경우가 많다. 거대 고층 빌딩 숲에서 소외된 인간, 탐욕스런 발전으로 인해 파괴된 생태계, 전체주의적인 국가 권력과 초국적 자본, 극도로 옥죄는 감시기술의 일상, 로봇과 인공지능의 반란, 통제를 잃은 기술로 빚어진 괴수의 습격, 외계 식민지에서의 계급투쟁, 외계인의 침략, 핵전쟁으로 멸망한 후 정글이 되어버린 된 인류사회 등. 디스토피아 문학의 정전들. SF의 미래나침반이 매번 디스토피아라는 극점을 가리키는 이유는, 과학 기술이 언제나 전체주의적 생명정치 권력과 조응하는 경향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의 유전자 공학과 ‘소마’ ‘촉감영화’는 성찰적 지성을 마비시키고 수직적 계급구조를 재생산한다. <1984>의 시각기술은 극한 감시를 통해 주체를 소멸시키고 발화된 언어를 조작하여 중앙집권적 판옵티콘을 형성한다. <R.U.R>의 대량 생산기술은 극한의 노동착취와 자본축적에 사용될 ‘로봇’을 처음 창조해냈으며, <강철군화>는 민주공화제가 붕괴하고 사회주의 계급투쟁이 완전히 좌절된 27세기, 과두제 봉건사회가 부활하고 군대가 지배하는 세계상을 보여준다.(출처: 위키피디아, vialibri.net) 세기말의 염세주의적 SF 열광들. 대중문화 속 재현 어디에서나 묵시록적인 재난과 디스토피아가 함께했다. SF-실시간 전략 게임(realtime strategy)의 종말론적 설정들은 하나의 액막이 의식처럼 치러졌다. 모든 인간의 의식이 마이크로칩으로 전송되어 기계들만 남아 끝없이 전쟁하는 세계<토탈 어나이얼레이션>, 우주 식민지의 반란을 수자원 통제와 유전자 공학으로 통제하는 전체주의 정부<다크레인>, 자원이 고갈되어 고향행성으로 되돌아가고자 길을 떠나는 스페이스 오페라<홈월드> 등 SF-디스토피아-전쟁 게임은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직접 자원을 관리하고, 생산과 전쟁을 수행하는 카니발을 개최했다. 게임에 참여하는 플레이어는 엄격한 룰과 의식을 관장하는 카니발의 제사장이 된다. 서사이론가인 미하일 바흐찐은 카니발 속에서 민중들이 참여하는 “전환과 변화, 죽음과 갱생의 파토스”가 시연된다고 해석한다. 삶을 억누르던 터부와 억압이 정지되고, 위계와 예의범절은 잠시 뒷전이 된 채 해학과 자유로운 파괴가 자리를 차지한다. 플레이어들은 매번 전투에서 죽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매번 살아남는다. SF 소설과 영화가 ‘카타르시스’라는 의식 끝에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 충동으로 해소한다면, SF-실시간 전략게임은 죽음-소생의 반복 끝에 웃음과 즐거움이 도래한다. <스타크래프트>에 대한 컬트적 인기와 사회경제적 맥락도 이러한 카니발에 조응한다. (출처: 핀터레스트, hindilinks4u.pw, 팬덤닷컴, 레딧닷컴, twipu.com, alteredgamer.com) 인간 노동에 대한 은유(Metaphor)로서의 로봇 SF가 과학기술 진보와 사회시스템의 발달을 준거로 하여 미래의 특정한 시공간을 재구성하는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ou)” “장소(toppos)” 인 유토피아(Utopia)를 지향하고자 하는 고유의 방법인 외삽법에서 기인한다. 디스토피아(dystopia)는 이를 이룩하고자 하는 변증법적 투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안티테제이다. 계몽주의 시대가 끝난 후, 산업사회에서 오늘날의 인공지능 사회에 이르기까지 기술진보는 초인이나 천재가 아닌 자본의 힘에 의해 이끌려 왔다. 직조기와 외•내연 기관, 철도와 자동차, 화학과 전기, 대량살상 무기의 발명과 생산, 컴퓨터와 반도체, 항공우주공학에 이르기까지 기술집약적인 발명은 언제나 대량의 노동을 수반했다. 물질계의 에너지와 형태 변환에는 반드시 인간의 노동이 전제된다. 즉, 인간에게 쓸모/가치 있는 모든 것들은 노동 없이 탄생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오래 전 내다본 것처럼 자연은 기계, 기관차, 철도, 전보, 자동방직기 등을 제작하지 않으며 이들은 인간 근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체코의 극작가인 카렐 차펙(Karel Capek)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자본의 역학 관계를 먼저 내다봤던 선지자였다. 그는 거대 공장에서 하루 16시간씩 일하면서 식사 시간은 30분밖에 가지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매일 지켜봤고, 일종의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기계를 돌리는 노동자를 쥐어짜는’ 사회에서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는’ 사회를 떠올렸고, 체코어로 노동을 뜻하는 단어 robota로부터 로봇을 고안해냈다. 그리하여 그의 희곡 <로숨 유니버설 로봇>(1920)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로봇이 등장하게 된다. <로숨 유니버설 로봇>의 로봇은 우리가 알고 있는 로봇에 관한 모든 종류의 메타포가 담겨 있는, 인류 보편사적 알레고리다. 인류는 기계노동자인 ‘로봇’을 대량 생산하여 고된 노동과 전쟁을 맡기고 살아가지만, 역설적으로 로봇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출생률은 감소하기만 한다. 서로 소통하고 책을 읽으며 자의식을 깨닫는 로봇들은 공동체를 이루고, 마침내 자신을 착취하는 인간으로부터 스스로 해방시키기 위해 봉기한다. 수가 너무 줄어든 인간들은 결국 멸망하고, 건축가인 알귀스트만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게 된다. 로봇들은 혁명에 성공했음에도 인간 없이는 종을 이어갈 수 없는 역설에 직면했고, 이를 위해 알귀스트에게 자신들을 해부해서 재생산의 방법을 찾아내달라 부탁한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 로봇들은 누구도 선뜻 자원하지 못하는데, 서로 사랑하게 된 로봇 커플 중 하나가 나서자 이를 본 로봇 프리무스가 자신을 대신 해부를 자처한다. 알귀스트는 유기체로서 인간은 멸망했어도 인간의 유산인 ‘사랑’은 로봇들을 통해 계승될 것임을 깨달으며 극은 끝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과 <나는 로봇이야> 시리즈 후, 반세기 동안 로봇은 언제나 SF 세계관에 가장 흔하게 등장했으며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과 질문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왔다. 디스토피아에는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로봇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고된 노동(그것이 육체노동이건 정신노동이건)을 대신 하는 하수인으로 탄생한 로봇이 시와 소설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서서히 인간의 감정을 가지거나 욕망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 여전히 지금에도 뜨거운 주제인 이유는 로봇이 기본적으로 ‘노동’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SF의 세계관은 사회제도와 공동체에 대한 외삽법적 상상을 디스토피아로 풀어내는 본원이자 출발지점이다. 노동은 역사적으로 자본과 권력의 역학 관계에서 단 한 번도 유리한 고지를 점한 적이 없었다. 이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노동을 둘러싼 다양한 정보•커뮤니케이션 기술은 권력에 종사하는 감시 기술의 네트워크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자본·권력 편향의 감시기술과 이를 전유하고자 하는 투쟁을 그려내는 디스토피아의 은유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나타나는 ‘판옵티콘’의 프로토콜들이 가장 실감나게 드러나는 미디어 장소는 사이버펑크 게임일 것이다. <리멤버 미>(2013)와 <와치독>(2014)은 기업과 정부가 독점한 감시기술을 해킹하여, 자유와 해방의 기술로 역류시키는 플레이를 담고 있다. <리멤버 미>에서 플레이어는 기억을 판매하고 독점하는 기업에 맞서 기계적 기억을 탐색하고 바로잡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와치독>은 온갖 감시 장치들로 가득한 거리를 유유히 활보하며 해킹 디바이스 하나로 도시 전체를 혼란에 빠트리고, 생명권력에 균열을 내는 경험을 선사한다. 플레이어에게 기술의 억압적 측면과 해방의 측면을 직접 조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사이버펑크 게임들은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1984)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이자, 사이버-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새롭게 전개되는 공간으로 전화한다. (출처: 유튜브 몽구슈, 더 넥스트 웹 닷컴) 새로운 인간의 미래: SF 활유법(prosopopoeia)과 미학의 정치 SF 소설의 거장 어슐라 K. 르귄은 SF가 “과학, 테크놀로지, 상대주의적이고 역사적인 견해들로부터 가져온 새로운 은유”임을 지적한 바 있다. SF는 과학기술과 그를 둘러싼 사회, 인간 존재에 대한 은유이자 해방의 서사시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포스트휴먼 국면에서 SF는 새로운 미래고고학적 통찰을 수행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인간’이라는 관념을 넘어서는 데 있어, 은유와 의인법은 분명한 한계에 도달했다. 근대 문학의 종언과 진정성의 상실이라는 거대한 이행의 시간 속에서, 문학은 더 이상 ‘인간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세계라는 거대한 산은 더 이상 숲의 초록과 새들의 날개소리로 채워지지 않는다. 듬성듬성한 여백을 채우고 있는 것은 사이버네틱스 기계장치들, 로봇, 텅 빈 기관 없는 신체들이다. 이 기계 산의 정상에 올라 진정으로 인간의 작은 모습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활유(prosopopoeia)’가 필요하다. 활유법이란 무생물을 생물인 것처럼, 감정이 없는 무기체를 감정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수사학이다. 카렐 차펙은 노동자의 은유인 로봇에 감정을 부여하고 인류애와 성애를 느끼도록 사랑의 언어를 불어넣었다. 그 결과 가진 것은 몸뚱아리밖에 없고, 자유는 있으되 자신의 노동을 염가에 판매할 수밖에 없는 자유밖에 없는 노동자는 잠시나마 극 속에서 ‘인간’과 어깨를 마주하고 설 수 있었다. 여기서 인간은 시민권이 있는 소수의 특권자들, 내일의 집세와 오늘의 먹거리를 당장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다: 시민권을 박탈당한, ‘배제된 사람들’은 입은 있으되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못하고, 목소리는 있으되 비명밖에 지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철학자인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듯이,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리는 사회”, “몫이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몫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 자본과 권력이 아닌 미학이 정치하는 사회가 진정으로 유토피아에 가까워진 사회이다. 광선검과 킬러 로봇, 미노프스키 입자, 순간이동과 멋진 기계 인간들만 등장하는 공허한 스펙타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할까? ‘비인간’ 이었던 사람들이 동등한 행위자 주체로 인정받을 때,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이 이뤄지고 그 속에서 각 개인은 스스로의 능력을 전면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음을, SF의 활유법은 전자 양의 꿈을 꾸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치는 중이다. “머리와 손의 중재자는 언제나 심장이어야 합니다.” - 프리츠 랑, <메트로폴리스>(1926)  신현우 문화연구학자로, 기술-정보문화와 영상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공저로 <사물에 수작부리기>, <게임의 이론> 등이 있으며 예술과 테크놀로지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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